어릴 때 엄마 아빠 차에 타면 엄빠는 꼭 개천에 핀 개나리나, 가로수로 있는 은행나무, 플라타너스, 단풍나무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인사를 해줘야 한다면서.
엄마가 ”안녕~ 나무들아~ 너무 예쁘지 않니~? 인사를 해줘야 해.”라고 하면 운전을 하는 아빠는 조용히 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뒤에 있는 차가 보면 차에 손이 달린 것처럼 보였을 것. 한문철 티브이에 나왔으면 뭐라고 했을까?
어릴 때는 그게 참 이상했다. 나무들은 보지도 못하고 대답도 못 들을 건데 왜 손을 흔들지... 좀 커서는 엄마 아빠의 행동이 낯 부끄러웠고, 조금 더 커서는 귀여웠으며, 지금은 내가 그러고 있다.
나는 손 대신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그럴 때마다 귀에서 음성지원이 된다. “너무 예쁘지 않니~?” 엄마 목소리를 성대모사하게 된다.
사실 나는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주변 사람들한테 종종 토로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낯 부끄러운 일 같았고, 뭔가 시크하지 않았으며, 어쩐지 내 결핍을 드러내는 일 같았다. 그런데 좋은 것을 좋다고 인정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좋은 것들이 덕지덕지 들러붙는다.
때때로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넌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서 좋겠다. “라는 말을 보기도 하고, 종종 듣기도 하는데 그럼 나는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을 권한다. 생각보다 한국 사회는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다. 미국에 처음 여행할 때 놀랐던 것은 초면에도 거침없이 밀려드는 칭찬이었다. “I like your coat" 같은. 그러니까 좋다고 말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 참 좋다.” 도 좋지만 “나 이거 좋아.”라고 주어를 똑바로 할 필요가 있다. 객관적인 좋음보다는 주관적인 좋음이 나를 더 풍요롭게 한다.
사진첩에 꽃과 나무, 하늘, 자연의 사진이 많아지면 으레 “나이 들었나 봐~” 라며 우스개 소리를 한다. 나는 그 낯설었던 풍경을 이해할 수 있어 그런 나이가 된 내가 좋다. 그 어여쁨과 좋음을 알게 되어 좋다. 나는 좋다. 그런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