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18코스 제주원도심 - 조천 올레
아침이면 눈을 떤다. 무거워진 몸과 마음은 어느새 익숙해진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다. 그렇게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뭔가에 꽂혀 섬광처럼 일탈을 감행하고 싶어 질 때가 있다. 똑같은 일과를 시작하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반복된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질 때 여행이라는 일탈을 꿈꾼다. 걸어보자 무작정 걷고 또 걸어보자는 어느 순간의 다짐으로 시작되었다. 손에 뭔가를 잡거나 무언가 탈 것에 의지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길게 아니라, 태어나며 주어진, 아직은 쓸만한 두 다리로 걸어보자고 하길 두어 달이 지난 것 같다. 회사를 마치고 터덜터덜 동네를 돌고 돌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도 반복의 연속임을 깨달을 때쯤 일탈을 감행해 보기로 했다.
제주 올레길의 시작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여행 가는 기분을 살릴 수 있게 비행기를 타는 게 좋겠다. 더 넓은 바다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는 바람을 맞고 전진하며 나아가면 좋겠다. 가는 길에 푸르른 산천도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독하겠지만 혼자였음 좋겠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길, 올레길이 들어왔다. 개인적으로 제주를 찾은 건 두어 번이었지만 차를 타고 다니는 여행이라 주요 관광지만을 도는 수박 겉핧기식의 말 그대로 관광이었을 뿐이다. 자동차의 편안한 목적지 이동도 포기하고 싶었다. 이동 수단으로 버스를 제외하곤 걷기만을 행하고 싶었다. 이유는 또렸하지 않다. 걸음으로서 육체적 고통은 예감했지만 그것보다 걸음으로서 잡념을 버리고 걸음으로서 비움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쉼 없이 달려온 인생의 전환점으로써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주고 싶었다.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판단할 시점에 나를 위한 시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여행의 설렘
일상을 맞이하는 아침은 늘 힘겹다. 지친 몸을 깨우는 게 쉽지는 않다. 그건 지극히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강박감이 잠에서 깬 몸을 짓누르는 무게이기도 하지만, 반복된 일상의 몸이 그에 맞춰져 힘겨워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행의 아침은 달랐다. 설렘에 밤잠을 설쳤지만 짧은 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일어나 스스로 준비하는 몸은 신기하리만치 활기를 띤다. 그저 여행이 주는 에너지에 몸은 쉽게 즐거워하고 반응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다. 목적지를 걷는 내 내도 마찬가지지만 목적지에 다다르고 나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간까지도 깨어있는 에너지에 새로운 생명을 맞이한 듯 즐거운 행복감은 쉽게 지치지 않는다. 길을 걷는 동안의 피로는 중력의 당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떨 땐 의지로 걷는 행위를 지속하는 게 아닌, 길로 이끄는 대자연의 힘이 끌어당김에 끌려다닌다고 해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올레길의 여정
18코스를 선택한 이유는 가까움 때문이다. 제주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제주 시내부터 시작하는 18코스가 조천 올레길이다. 막연한 시작이었지만 여행이라는 설렘과 행복감으로 빨리 시작해보자는 마음이 앞선다. 스마트폰 지도를 꺼내 제주 공항에서 첫 출발지인 간세 라운지로 이동할 버스가 오길 기다리며 여행의 시작에 다시금 설렌다.
18코스의 시작점이자 17코스의 끝점인 간세 라운지를 만난다. 제일 먼저 맞아주는 간세 표식들이 여행객의 첫 만남을 반겨주는 듯하다. 낯선 곳을 처음 방문하는 첫 느낌은 언제나 어색하지만 설레게 한다. 카운터에 모녀(?)인 듯한 두 분이 제일 먼저 맞아 주신다. 각종 기념품과 음료, 간단한 식사 메뉴판이 눈에 들어온다. 금강산도 식 휴경이라고 하지 않은가. 출출한 배를 채우고 정보도 얻어갈 겸 발길을 들여놓아 본다.
여행의 어색함은 낯선 곳을 방문할 때부터 시작된다. 그 어색함을 깨기 위해 여행객의 신분임을 포장해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오버스런 모습을 표출한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좀 진지하게 보이는 모든 곳에 눈길을 주고 관심을 가진다. 걸려있는 모든 정보판과 전시물들을 눈에 다 담겠다는 진지함으로 팔짱도 껴보고 입가 주위에 손을 대보기도 한다. 직원분들께도 과도하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그들이 이 길의 전문가임을 인지하고 무지한 여행자의 자세로 고개를 끄떡이며 때론 질문을 때론 경청의 자세를 취한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사물과 사람들에게 세상의 진지함과 순수함으로 마주한다.
도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걷기 위해 온 이곳에서 다시 도시를 만나는 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도심지를 빨리 벗어나 탁 트인 바다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여유는 사라지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콧구멍으로 들어올 바다 냄새를 깊은 폐부로 집어넣어야 여행 온 진짜 기분이 들 거 같다.
날씨가 을씨년스러운들,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이 보이지 않은들 상관없다. 어차피 혼자 나아갈 거라고 다짐한 이상 바다와 하늘과 땅이 있고 홀로 그 속을 걷는 나만 의식하면 된다. 수많은 인간관계와 이해관계 속에 때론 모질게도 굴었고 때로는 모진 말들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잠시나마 떨쳐버리고 나를 위한 시간, 나만에게 집중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른 봄이라 오고 가는 사람이 드물다. 날씨도 쌀쌀하지만 그 유명한 제주 바람도 맹위를 떨친다. 빠른 걸음이라 제법 땀이 날만도 할 텐데 거칠고 차가운 바람이 몸에 남은 수분끼마저 바싹 말리는 듯하다. 혼자 걷는 길이었던 만큼 사람을 배제하고 싶었다. 길을 따라 펼쳐진 자연의 품속을 걸으며 혼자이고 싶었고 고독해지고 싶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을 수는 없다. 저만치 앞서 가시던 중년의 한 여행자는 씩씩한 걸음을 걸으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걸을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 길에 단 둘이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는 동질감과 호감을 보이고 싶었으리라. 말을 걸고 싶었어리라.
같은 처지에 말동무라도 할 요량이었겠지만 끝끝내 거리를 두고 싶은 걸 눈치채셨는지 저만치 멀리 사라진 뒤 다시는 보이질 않으신다. 한편의 안도감과 함께 미안함 감도 생긴다. 어쩌면 마음을 열어보자 떠난 여행이었지만 혹시 다시 마음을 닫아버리는 옹졸함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이 된다.
걷는 게 아무리 일상화되었다지만 쉬운 게 아니다. 동네 한두 바퀴 걷는 산책 수준과는 달리 몇 시간을 뚜벅뚜벅 전진하며 걷는 건 육체적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처음엔 주변 경관을 보는 신기함으로 어떻게 걸어왔는지도 모르게 씩씩하게 잘 걸어간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오면 새로움도 식상해지고 두 다리가 어쩔 수 없이 앞만 보고 내딛는 느낌을 받는다. 그 시점이 바로 걸음의 고통이 시작된다. 잠시 쉬어도 보고 물도 마셔보고 하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목표가 있어 나아가는 길이지만 힘겹게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삶의 무게처럼 힘겹게 다가온다.
육체적 고통이 점점 몸을 짓누르고 지치게 만들 때, 바로 그때가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고민의 물음이 시작된다.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고 살아가는 지금의 걱정과 미래의 계획들이 한데 어우러져 끝없는 생각의 고리를 만들어 나간다. 걷는 내내 육체는 앞을 향해 움직이지만 정신은 사방팔방으로 튀어 다닌다. 길은 미쳐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매개체이다.
바다가 낯설다. 똑같은 바다임에도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달라서 낯선 것 같다. 여름휴가철에 가득 찬 인파의 혼잡함속에 보았던 뜨거운 바다, 세찬 바람에 얼굴을 칼로 도려낼듯한 매서운 겨울 바다, 따스한 봄날에 살랑이는 아지랑이 마냥 너울대는 조용한 바다와 달리 오늘 보는 제주의 바다는 흐린 날씨에 간간히 구름 사이로 내려쬐는 햇살 아래 하얀 포말을 드러내며 신비감을 보여준다. 강한 바닷바람의 저항을 맞서서라도 꼬깃꼬깃 눈에 담고 또 담고 싶은 제주의 바다다. 그리고 저항하며 걷는 이 길은 고달프지만 알게 모르게 전진하며 나아가는 뿌듯함을 선사해준다.
마을과 골목을 지날 때면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과 건물들 사이로 우리네 삶의 흔적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속에 묻어있는 삶의 애환과 정겨움은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오만 감정과 다르진 않다. 길을 걸으며 느끼는 여정의 궤적은 인연을 스치고 지나가며 느끼는 사람 사이의 애정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무심코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지만 내가 지나온 인생의 흔적만큼 이 길에서 그 흔적들을 다시금 되뇌이는 느낌을 받는다면 좀 오버스러운 감정일까.
길을 돌아돌아 마주하게 되는 일몰의 바닷가는 인생의 황혼만큼이나 극적이고 멋스럽기까지 하다. 어둠이 찾아오면 낮에 가졌던 흥분과 환희가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 침잠하여 내일을 준비해야 하듯이 마지막 저문 해를 마주하며 생각을 정리할 때가 다가온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끝에는 새로운 시작도 공존한다. 18코스가 끝나는 곳에는 19코스가 시작되는 이정표가 보인다. 가다가 여러 번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생각보다 더 많은 거리를 걸었던 것 같다. 이른 봄의 쌀쌀한 날씨여서 해가 져가는 제주의 바람도 더 차가워지고 지친 몸도 힘겨워하고 있다.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 여행객은 나 혼자였던 거 같다. 일과를 마친 학생과 직장인들의 지친 모습이 어느덧 낯설어 보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 다양한 사람들 중에 나도 한 개체였었는데. 이질감만큼 동질감도 교차한다. 첫 올레길은 그런 감정의 교차를 오랜만에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하루가 어둠속으로 저물어간다.
2017.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