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길 16코스 : 고내 - 광령 올레
제주올레 16코스 : 고내포구(0) - 신엄 도댓불(1.5k) - 남두연대(2.8k) - 중엄새물(3.8k) - 구엄 돌염전(4.6k) - 수산저수지(7.1k) - 항파두리 항몽유적지(11.4k) - 항파두리 코스모스 정자(11.7k) - 광령1리사무소(15.7k)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Happiness is the frequence,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 행복의 기원
로또에 당첨되어 큰 부를 얻거나, 멋지고 값비싼 외제차를 구입하는 등, 인생에서 드물게 누리는 큰 강도의 만족은 빈도도 드물뿐더러 강한 강도만큼 행복감은 지속되지 못한다. 작은 목표를 자주 달성하며 느끼는 지속적 성취감과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감의 잦은 노출이 연속성으로써의 행복 지수를 높일 수 있다는 말이다. 최근 유행 중인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여행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우리네 일상에서도 누릴법한 작은 성취들이나 잠시 잊었던 일상의 작은 행복들을 발견하면서 누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길을 따라 걸으며 보게 되는 아름다운 풍경은, 아스팔트 위 도시 일상에 찌들어 잠시 잊었던, 자연이 전해주는 신선함과 청량감을 느끼게 해 준다. 길에서 만나는 다른 여행자와 나누는 인사 한마디는 사람 사이에서 잊혀졌던 그리움의 정을 나누게 해주며,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을 쳐다보면 평소 고개 한번 들지 못해 제 머리 위에 어떤 광경이 있는지 조차 몰랐던 일상의 각박함을 잊게 해 준다.
그래서 여행은, 일상에서 잠시 잊었고 놓쳤던, 소소한 기쁨과 행복감을 만끽하기 위해 떠나는 삶의 또 다른 여정 같은 것이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다.
전날 밤 15코스 종점(16코스 시작점)인 고내포구 인근에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하쿠나 마타타)의 전경은 평범하지만 포근함과 정겨움을 품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인분이 차려주신 아침상이 인상적이다. 간간한 볶음밥 위에 놓인 계란 프라이 한 장과 된장국, 몇 가지 반찬으로 구성된 단촐한 아침상이지만 그 어느 식당이나 집밥보다 정성이 한가득 묻어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아침을 준비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고, 그 어떤 진수성찬 보다도 더 감동적이다.
따뜻한 아침 식사로 배를 채우고 16코스를 시작하기 전, 숙소 앞 고내포구를 둘러봤다. 낮게 깔린 구름과 맑은 하늘이 몸과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제주의 바람은 거세기 그지없다. 높은 파도가 부서지는 방파제의 우렁찬 소리를 곁에 끼고 발걸음을 내딛는다. 바람은 거세고 기온은 한참 떨어져 있어 따뜻한 온기가 그리워진다. 한참 해안길을 끼고 걷던 중 따뜻한 커피 한잔이 생각나 카페(스타벅스 애월 DT)에 들렀다. 바로 앞 바닷가 파도는 하얀 포말을 사납게 들이며 밀려왔다 밀려가길 반복한다. 카페 안 온기와 따뜻한 커피 한잔이 여행자의 차가워진 몸을 녹인다. 바깥과 안은 차가움과 따뜻함이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공존한다. 유리 한 장의 고마움, 커피 한잔의 고마움에 더해 온몸으로 퍼지는 온기에 잠시나마 작지만 따뜻한 행복감을 누려 본다.
도시 생활에서 얼마나 자주 이정표를 쳐다보며 걸을까? 내비게이션의 출현 이후로 사실 길을 따라걸으며 이정표 볼 일이 많이 줄었다. 늘 익숙한 거리와 장소를 이동하며 으레 가야 할 길을 걷지만 거리의 표식들을 찾아보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여행을 다니다 보면 작은 표식하나 푯말 하나에도 집중하고 자주 쳐다보게 된다.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이기도 하고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올레길의 방향표시와 간세표식은 그래서 그 어느 이정표보다 반가울 수밖에 없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내게 끊임없이 방향을 지시해주고 이탈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이정표를 만나는 일이 이보다 반가울 수 없다. 인생의 등대처럼 여행길의 든든한 등대가 되어준다.
목줄에 매여 산책하는 반려견들과, 주인과 일상을 보내는 반려견들은 수없이 봐왔지만 그 어떤 큰 감흥은 없었다. 그냥 그런 광경이고 그냥 스쳐 가는 일상일 뿐이다. 여행길에서 만난 동네 개 한 마리와 이른 아침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보니, 개가 주인인지 내가 이 길에 주인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저 길게 뻗은 여행길에 길동무 인양 아무 말없이 걷노라면, 외로운 혼자만의 여행길이 아닌, 정겨운 동무와 함께하는 동행길이라는 작은 위안을 받는다. 길 위에 내버려진 방랑자라는 동질감이 혼자인 여행길에 잠시나마 외로움을 덜어준다.
많은 여행 사진이 그렇듯 눈으로 보는 풍경과 사진에 담아낸 풍경사이에 가장 큰 특징은, 눈으로 본 세상을 사진 한 장에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더 넓게 더 많이 담아내려고 카메라(휴대폰)를 세로보다 가로로 눕혀 찍게 된다. 의식하진 못했지만 결과물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가로로 비친 풍경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자연의 광활함을 좀 더 많이 담아내고자 하는 열망의 결과인 듯하다. 여행 후 다시 꺼내본 사진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좀 더 좋은 휴대폰, 좀 더 값어치를 하는 카메라를 사고 싶은 욕구가 들곤 한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추억의 한켠을 잘 간직할 수 있다는 위로로 잠시 물질적 욕망을 접는다.
점심때가 되어 경로밖에 한 식당을 들렀다.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 출발 전 추천해 주신 집이다. 일반 가정집을 개조해 사찰 음식을 내어 놓는 곳이다. 정경도 고즈넉하고 아늑해 보인다. 단감에 절인 김치 양념장은 난생처음 접한 맛인데 굉장히 신선하다. 담백하고 정갈한 차림상 또한 오감을 더 자극한다. 뜻하지 않게 추천을 받고, 뜻하지 않게 경로를 한참 벗어나 당돌한 곳이지만, 그 어느 밥집보다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도시에도 유명하고 맛난 음식점이 많지만 여행에서 만나는 이런 맛집은 사뭇 기대감을 높여주기도 하고 음식 맛의 감동을 배가시켜 주는 것 같다. 여태껏 편의점 식사나 발길 닿는 곳에서 끼니를 해결하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훌륭한 맛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큰 행운이다. 소소한 행복의 우물을 만난 것 같아 흡족해진다.
오후 늦게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의 역사적 장소에 다다랐다. 이곳저곳 여전히 유적 발굴 현장의 생생함을 접할 수 있는 장소다. 하지만, 덩그러니 남은 구획과 흩트러진 돌무더기의 흔적만 남아 있어 밋밋하기 그지없다. 역사적 장소이고 가치도 높은 곳임에 틀림없지만 넓은 들판에 토사만 덩그러니 남은 모습은 눈요기 거리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다. 현장을 쭉 둘러보고 한 켠의 박물관을 둘러본 후 발걸음을 돌렸다. 항몽유적지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가던 길로 다시 접어들던 순간 유적지 바로 옆, 뜻하지 않게 가을의 정취를 흠뻑 담은 단풍빛이 흐트러진 좋은 장소를 만났다. 단풍 구경을 가지 못한 나로서는 뜻밖의 붉은 물결 장관을 만나는 행운을 만난 것이다. 부족했던 눈요기 거리를 잠시나마 충족시킬 수 있는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여행길은 사실 특별할 게 없다. 익숙하지 않은 길이지만 뚜벅뚜벅 걷다 보면 어느덧 목표 지점에 와 닿는 시간 여정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행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일상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사람의 소중함, 자연의 신선함, 장소의 특별함을 일깨워주는 시간이 되어준다. 누군가는 그냥 스쳐 지나갈 이 길 위에서 나는 특별한 감흥과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길 좋아한다. 그로 인해 가져다 줄 마음의 여유와 여행 자체를 즐기는 데서 오는 작은 행복감은, 평범하고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 내게 또 다른 특별함을 선사해준다.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또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만남을 고대하고 기다리며 다음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2017.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