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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자까 Jun 13. 2018

여행길은 인생길이다

제주올레길 15코스 : 한림 - 고내 올레

 오고 내리는 많은 여행객들을 대하는 비행기 승무원들을 자주 마주치다 보면, 그네들이 사람을 대하는 진정성과 연륜의 차이가 구분 가능해진다. 손짓하나 미소하나에 담긴 미세한 차이가 느껴진다는 말이다. 물론, 얼굴에 드러나 나이 흔적만으로도 고참 승무원의 위치 파악은 가능하다. 하지만, 고객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나이 듦의 흔적을 제쳐두더라도, 작은 배려의 몸짓과 연륜에서 묻어난 여유는 각자 달리한다. 고객 접점에서 터득한 노련미라고나 할까. 산전수전 다 겪고 난 뒤에 가지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고참이 그냥 고참이 아닌 것이다.


 직장 생활에서 나이 들어 고참이 된다는 거, 거추장스럽고 융통성이 부족하고 때론 조직에 짐이 된다 생각한 적이 있다. 비효율적으로 일하고 꽉 막힌 권위주의로 버티는 거라 생각한 것이다. 신속한 의사결정과 발 빠른 대응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고참은 무능하며, 후임 일 때 고참은 얼굴의 미소와 여유보다 진지함, 절박함이 더 필요한 자리라 여겼다. 하지만, 조급한 결정과 섣부른 판단이 종국엔 일을 꼬이게 만들고 일처리가 오히려 느려지는 결과를 가져다 줄 때마다 매번 깨닫는다. 연륜은 그런 조급함에서 나오는 게 아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다듬어지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은 느리고 무심해 보여도 오랜 경험을 통한 깊은 통찰과 순리를 터득하는 것이 세상 일을 좀 더 매끄럽게 진행시킨다는 것을 알아간다.



[시작] : 아침의 기억이 좋은 이유는 새로움을 맞이하는 첫 순간 이여서다. 밤사이 모든 게 잠들었다 깨어나는 순간은, 정적이던 주위가 동적으로 바뀌는 순간의 시작이며 그 시작의 태동을 온 감각으로 누릴 수 있는 때이다.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한림항 바닷가에 잠시 나왔다. 어둠을 깨고 빛이 서서히 들어서는 하늘과 바다가 있고, 그 빛을 받아 세상 사물의 꿈틀임이 시작된다. 그 현장에 서서 고요한 태동의 시작을 가감 없이 받아들인다.

여명이 들어차는 한림항 부두앞
한림항 부두앞 선박들


[선택] : 전날 코스의 걸음이 무리가 된 듯하다. 아픈 종아리와 발바닥에 잡힌 물집을 어루만지며 출발한 아침이 그다지 유쾌할리 없다. 느리게 천천히 걷기를 다짐해 본다. 어떤 경우에도 의욕과 고통은 동반한다. 무리하지 않고 한 템포 쉬어가야 할 것 같다.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수많은 기회를 만나고 그 기회 속에서 최선을 선택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이 곳 올레길도 그런 선택의 과정을 빈번히 만나는 곳이다. 시작하고 얼마지 않아 15-A와 -B코스의 선택이 기다린다. 큰 갈등은 없다. 바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륙을 통과하는 B코스 보다 해안길을 따라가는 A코스를 조금의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차후에 내륙 코스를 둘러볼 기회가 된다면 다시 가보겠지만 현재의 최선은 이미 내렸다.  

해안길 A코스와 내륙길 B코스로 갈라지는 지점
올레길의 시야는 명확하다. 하늘과 땅, 그사이를 가르는 건물들.



[위로] : 길을 걷다 보면 늘 신나고 유쾌한 발걸음만 내딛는 건 아니다. 말동무라도 있으면 이런저런 얘기도 하며 놀며 쉬며 정겨움을 안고 함께 걸을 수 있지만, 혼자 걷는 길에서 늘 고조된 기분을 안고 걸을 수는 없다. 적적함, 외로함, 허무함, 피로감이 함께 몰려올 때 물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쉬었다 가는 방법 말고 딱히 해결책이 없다. 좋은 경치와 살랑이는 바람조차 큰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있다. 시작의 흥분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그럴 때 올레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작품들은 지친 여행자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 해변길을 따라 그려진 벽화들과 조각상들을 보며 미소와 때론 실소를 머금는다. 잠시나마 적적함을 잊게 해준다.

해안길에서 만나는 벽화
해녀 조각상
앉는다면 민망함은 본인 몫



[배려] : 한림 해변도로의 탁 트인 바다를 끼고 걷다 보면 조용한 어촌마을 '귀덕리'에 다다른다. 막 물질을 끝내신 해녀분들이 줄을 지어 뭍으로 올라오신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해변 계단길을 삼삼오오 올라오시는 모습에 내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짠함 같은 게 몰려온다. 감히 가까이 다가서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송구스럽단 생각이 든다. 먼발치에서 풍광을 담아낼 요량으로 저만치 물러나고 있는 와중에 아니나 다를까, 곁에서 그 모습을 담아내기 바쁜 일련의 여행객들이 해녀분에게 야단을 들으신다. 올라오는 길목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니 당연 길목에서 방해를 받으셨던 모양이다. 쉬는 중이라면 양해를 구하고 한 컷 담아낼 수 있었겠지만 막 물질을 끝내고 노곤한 몸을 뭍으로 옮기는 길목에서 얼쩡대었으니 한소리 듣는 게 어쩜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네들에겐 삶의 현장이겠지만 누군가에겐 눈요기 현장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 미묘한 감정선에서 부딪친 것이다.

물질을 끝내고 뭍으로 올라오시는 해녀분들



[보상] : 15-B코스의 하이라이트 중 한 곳은 순백의 모래사장이 펼쳐진 '곽지해변(해수욕장)'이다. 저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고운 모래밭이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다. 푸른 하늘과 검은 바위 사이에 두드러져 보이는 하얀빛, 아니 밝은 모래빛 백사장이 눈을 사로잡는다. 굳이 표현하자면 햄버거 패드, 빵과 고기 사이에 신선한 양상추 마냥 눈에 띄는 신선한 빛이라고나 할까. 옥색의 바다 빛은 덤이다. 청량감 가득한 시원한 빛에 기분이 한껏 들뜬다. 처음에 마주한 내륙길과 해안길의 선택은 바로 이런 차이 때문에 망설임 없이 해안길을 선택하게 만든다. 도시에 사는 내게 이런 호사가 얼마나 자주 있을 일일까 잠시 생각해 보면, 지금 누리는 호사는 그동안의 찌든 도시 생활에서 겪은 노고의 보상이라 할 만하다.

곽지해변으로 향하는 길
하늘빛과 바다빛, 모래빛이 어우러진 곽지해변길



[축복] : 곽지해변의 아름다움만큼이나 눈부신 예비부부 한쌍의 웨딩촬영이 한창이다. 멀리서 잠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대자연의 싱그러움만큼이나 그 배경을 병품 삼아 자신들의 매력을 발산하는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일렁이는 바람결에 이리저리 머리가 휘날려 사진작가는 애를 먹고 있지만, 푸른 제주 바다의 풍광을 등지고 나란히 서있는 그네들의 모습은 누가 뭐래도 인생의 시작을 준비하는 예비부부이지 않은가. 어색하고 힘겨운 준비시간이지만 그 어색함이 익숙함, 행복함으로 무르익어 갈 것이다. 잠시나마 축복의 염원을 보내드린다.

곽지해변에서 웨딩 촬영중이신 예비부부
곽지해변 전경
고운 모래밭과 길이 뻗어있는 곽지해변



[여유] : 곽지해변을 지나 한담 해변을 끼고도는 '곽지 과물해변 산책로'는 두 번째 하이라이트다. 15-B코스를 통틀어 가장 낭만적이고 풍경이 뛰어난 길이지 않을까 싶다. 산책길로 잘 꾸며져 있기도 하지만 이 길을 따라 걷는 이들 또한 좀 더 여유 있어 보이고 반면 들떠보이기도 한다. 여기저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분주한 모습도 많이 보인다. 어디를 찍어도 한 폭의 작품을 담아낼 수 있다. 오고 가는 연인들, 가족들,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책길은, 발걸음 가볍게, 이는 바람에 머리를 넘겨가며 한적하게 걷기 좋은 곳이다. 인생의 황금기 같은 길을 걸어나가는 기분에 젖을 수 있다.

곽지 과물해변 산책로
해변도로를 따라 걷는 여행객들
멋진 해안길을 따라 걷는 행운을 만낄할 수 있는 곳
하늘과 바다, 길이 어우러진 산책길



해변 산책길을 막 벗어나는 시점은 놀라움의 순간이다. 세상에! 풍치 좋은 해변 카페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 붐빌 줄이야. 인산인해 그 자체다. 커피를 마시러 온 사람들이라기보다 풍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연예인이 차린 그곳 또한 만만치 않다. 안과 바깥은 그야말로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에서 사진 찍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하루 매상이 얼마일까, 떼 돈 벌겠다 등의 상업적인 잡념이 올라온다. 좋아서 걷는 길이지만 이 길에서도 상업의 냄새는 곳곳에 묻어 나온다. 신기함에 사람 구경도 잠시 해보지만 관광객이라는 지위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전체 과정에서 유별난 곳도 있다는 마음으로 잠시 스쳐 지나가는 길이다라고 넘겨간다.

대형 커피잔을 이고있는 해변가 카페
해변 카페가 구경꾼과 손님들로 인산인해다
연예인 G드래곤의 카페. 역시나 밖에서 사진찍는 이들로 붐빈다.



[굴곡] : 어수선한 기분에 잠시 빠져있다 벗어나면 다시 한적한 길로 접어든다. 걷는 여행길은 언제나 늘 그러하듯 요동이 있다. 들뜬 마음에 힘차게 걸어나가다가, 고요함에 차분해지기도 하고, 긴 여정길이 힘들다가도, 한적함에 마음이 가라앉기도 한다. 마지막 여정일 듯한 애월 방파제로 향하는 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의 흔적들이 사라졌다. 고요함과 적적함이 다시 시작된다. 항구의 시멘트 바닥 길은 그동안 빠져있던 자연의 흙길 속의 정겨움을 완벽하게 뺏어간다. 따가운 햇살이 가는 길을 힘겹게 만들고 쳐지게 만든다. 저 멀리 보이는 등대의 오롯함만이 오아시스의 야자수를 찾아가듯 발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애월항
애월방파제쪽 등대



[마무리] : 아침 일찍 시작된 고된 걸음걸이의 종착지가 보인다. 15코스의 마지막이자 내일 아침 시작할 16코스의 시작점인 고내포구 앞. 어느 듯 해는 저물고 비가 올 듯 하늘은 잔뜩 찌부러져있다. 시작에서의 신선함은 어느덧 종착지에서의 노곤함으로 변해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금방이라도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뿐.

 제주 올레길이 가진 장점 중에 하나라면 시작과 끝이 있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대자연과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마냥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과정을 겪어내야 하는 주체자로서가 아닌 방관자로서, 관찰 대상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올레길은 휴식의 길이면서 관찰의 길이다. 내가 참여하는 적극적인 인생의 길은 아니지만 멀리 떨어져서 또 다른 세상과 또 다른 삶을 그냥 보고 관찰하고 느끼는 과정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고내포구앞 올레길 표지. 15코스의 끝과 16코스의 시작점.
숙소에서 바라본 고내포구 앞



201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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