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14코스 : 저지 - 한림 올레
습관의 힘을 믿는 나로서는 여행도 하나의 습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다이어트를 시도하다 포기하거나, 기타를 배우다가 그만두거나, 독서 계획을 세웠다가 포기하는 등의 일련의 실패들은 신체적, 정신적 습관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실행해 가며 만들어낸 습관은,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지는 단계의 변곡점을 지나는 시기 이후엔, 웬만해선 거르는 경우가 없다. 한 번을 거르는 일 자체가 큰 고민으로 다가 올뿐만 아니라 또 하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찜찜함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 활동 중 목표를 정해 정진하는 활동의 실패 원인은, 결국 습관화가 몸에 박히지 못해 발생한 결과라고 단언하고 싶다.
여행도 연습이 필요하고 습관이 필요하다.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도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으로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 생각할 여유, 기회를 주자고 다짐해 본다. 이번 여행을 갈까 말까 고민하기에 앞서 일단 가자, 가서 또 부딪치고 가서 또 다른 고민을 해보자. 여행의 목표를 걷는 행위, 걸음으로서 사고의 여유를, 사고의 폭을 다변화해보자고 다짐한 지라 여러 번의 걸음이 자연스러운 이끌음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기대해 보는 것이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잠시 여유를 만들어 내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내 위치에서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있고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그걸 다 내려놓고 며칠간의 여행을 떠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떠나기 전 망설임도 많다. 그냥 다음으로 미룰까? 좀 더 여유가 있을 때 갈까?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은 없을까? 나 좋자고 떠나는 여행이 혹여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
이런 모든 생각과 고민을 뒤로하고 결국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이유는, 저항을 뿌리치고 일어설 수 있는 습관을 몸에 베개 하기 위해서다. 처음은 힘들지만 한 번, 두 번, 여러 번. 습관으로 정례화를 만들면 저항감도 줄어들 것이고 그에 따른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의 목표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해 주지 않는다.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나 나를 위한 시간, 나만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나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한번 이 자리에 섰다. 시작점..
14코스의 시작점인 저지예술 정보화마을 앞 간세 표식에 어느덧 서있다. 처음 와 본 장소에서의 낯섦과 시작에 앞서 느끼는 묘한 설렘이 교차한다. 긴 시간 동안의 걸음이 몰고 올 피로감이 미리 확 와 닿는 건 이전의 경험에서 충분히 맛보았던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살짝의 흥분감에 도취되어 빠른 발걸음을 앞세우고 싶은 조급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아갈 이유가 있다면 낯선 곳을 밟으며 경험하게 될 바깥세상의 신선함과 나를 돌아보게 될 숙고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쳇바퀴에서 가진 익숙함은 편안함을 지켜주지만 새로움을 경험하지 못하고 늘 좁은 철장 안에 갇혀 협소한 식견을 고수하게 할 것이다. 익숙함, 편안함을 깨는 일이야 말로 새로움과 넒음을 맞이할 수 있는 포용의 힘을 기르는 길이다. 그 시작이 여행의 첫걸음이지 않을까 싶다.
가을의 제주엔 선인장 열매(백년초)가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더 넓게 펼쳐진 선인장 밭의 풍경도 이색적이지만 붉게 물든 수많은 선인장 열매를 보는 것도 육지에선 드문 일이다. 문득 든 생각은 주변분들이 제주도만 다녀오면 제주도 초콜릿을 사 오시는데 그 포장지에 선인장 그림을 자주 본듯하다. 그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이 많은 선인장을 키우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물론 다른 용도야 있을 테지만.
큰소낭숲길, 굴렁진숲길, 월령숲길을 따라 잔잔한(?) 산책을 끝나는 시점이 무명천 산책길이다. 숲길을 따라 조금 험한 길을 10여 킬로 걸어온 탓에 몸이 피로감을 호소할 때쯤 평온한 안식의 길을 만나게 된다. 쭉 뻗은 갈대의 살랑임만으로도 여행자의 피로감이 조금씩 물러간다. 배경을 바탕으로 셀카 찍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는 갈대 산책길이다. 그리고 그 끝엔 내륙을 뒤로하고 만나게 될 제주의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지만 내륙의 끝 월령 선인장 자생지에 닿으면 바다와 더불어, 선인장 군락지, 해안길, 사람, 풍차에 바닷바람까지 덤으로 만끽할 수 있다. 모든 오감을 자극할 요소가 다 갖춰진 곳이다. 걷기의 연속으로 지친 몸과 고개 숙인 마음을 한껏 들춰주고 가슴을 열게 해주는 곳을 맞닥뜨리게 된다. 조금 차가워진 바닷바람에 몸을 움츠릴 만도 하지만 고무된 기분은 그런 움츠림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한 보상을 안겨준다.
늦가을 제주 해변은 성수기를 지난 뒤라 사람 수도 적어지고 한적한 여유까지 묻어난다. 삼삼오오 가족과 아이들이 해변의 모레를 벗 삼아 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간간히 볼 수 있다. 늦은 오후, 저물어 가는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는 황홀함은 강한 인상으로 뇌리에 박힌다. 잠시 앉아 그 자연의 빼어난 경관에 빠져드노라면 시간의 흐름조차 잊게 한다. 마냥 앉아서 이 자유로움이 영원했으면 하는 감상에 젖어든다.
지친 몸과 주린 배를 참으며 걸어간 길의 끝이 희망으로 조금 달달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마주하고 걷는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제주에서 가장 제주답지 않는 곳을 꼽으라면 한림항 도로길을 꼽겠다. 나름 큰 항구 주변이라 그런지 고즈넉한 경관과는 거리가 멀다. 쭉 뻗은 도로 위 허럼한 공장지대를 걷는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가 않다. 마지막 종착지를 걷는 3킬로 거리는 음침하기까지 하다. 가로등 길을 따라 마지막 맞닥뜨린 곳은 종착지, 한림항 도선 대합실 앞.
말이 좋아 여행의 습관이지 하루 내내 걷고 난 후의 지친 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여행자의 피곤함과 노곤함, 굶주림을 동반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그럼에도 하루의 끝에서 맛보는 성취감은 또 하나의 과정을 무사히 치러낸 안도감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하루, 이틀, 사흘... 연속된 과정 속에서 무엇을 보아왔고 무엇을 느꼈는지 되돌아 보고 다시 점검하는 일련의 과정이 썩 나쁘지 않은 경험을 쌓게 해주는 과정이 될 것이다.
무심한 듯 치러내는 여행의 과정이 조금 삭막한 학습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여행은 어차피 삶의 한 궤적을 그리는 흔적이 될 것이다. 그렇게 습관처럼 여행은 또 다른 경험의 흐름을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2017.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