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매력을 모두 지닌 대만 - (1)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모기와 싸우며 맥주를 마시던 때가 벌써 아득하다. 유월 초 약 2주간 다녀온 대만은 마치 꿈결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언제까지 대만앓이를 하려나 싶었지만 현실은 지독했다. 월요일 아침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에 지친 나를 반긴 것은 함께 오지 못한 내 가방과 여행 중 병원 방문의 보험 처리였다. 동에서 서로 올 때는 시차 적응이 빠르다곤 하지만 하루 동안은 조금 고생해야 하는데 여행이 끝난 순간부터 현실이 치고 들어오니 낭만이 낄 자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 한 켠에 남은 대만의 추억에 젖어 있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처음 가본 곳인데 애잔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없던 학창 시절 추억까지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대만,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올해 만큼은 꼭 아시아, 특히 동남아시아 여행을 하리라고 작년 말부터 마음을 먹었다. 동남아는 내가 좋아하는 지역인데 유럽에서 살면서 한번도 가보지 못해서 무척 그리웠다. 뜨거운 햇볕, 짜증날 정도로 높은 습도, 큰 잎으로 무성한 키 큰 나무, 벽을 타는 게코, 착한 심성의 사람들. 이들이 모두 그리웠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인 태국이나 한번도 가보지 못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생각했는데 결국 동아시아에 더 가까운 대만으로 결정하게 된 이유는 친구들 때문이다. 혼자하는 여행보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 또한 그리워 한국 친구들에게 여행을 제안했고 비행기삯이나 일정 등을 따졌을 때 가장 적합한 곳이 대만이었다.
타오위안 공항 건물에서 한 발자국 나서는 순간 내 몸을 휘감은 높은 습도는 열대성 지방을 느끼기 충분했다. 하지만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혀 우중충했고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서는 풍경 또한 한국과 같아서 조금은 우울했다. 비도 내렸다. 아일랜드 기상청 앱을 켜니 화창했다. 날씨 좋은 유럽을 두고 난 왜 여기로 왔나 한탄했다. 하지만 이는 타이베이의 진수를 느끼기 전 초심자의 판단에 불과했다.
낡은 건물 사이를 걸으며 홍콩과 방콕을 느꼈고, 편의점이나 소품샵을 지날 때면 일본 같은 느낌도 들었다. 숙소가 있던 시멘은 그저 명동 그 자체였다. 대만도 일제강점기를 겪은 나라라 일본식 건축들이 남아있는데 그럴 때면 여기가 도쿄인가 싶은 느낌도 들었다. 한켠에는 아시아 첫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국가라는 자부심으로 그려진 무지개색 도로와 그 주변의 퀴어 매장과 술집들이 거리낌없이 있었다. 일제 시대 건물인 홍러우는 이제 다양성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남녀 구분 없는 화장실이 구비된 것은 물론 대만 성소수자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시내 중심에 이런 곳이 있는 것은 서울도, 도쿄도, 홍콩도, 방콕도 아닌 대만만이 가진 문화다.
그리고 하나 더... 대왕 사이즈의 바퀴벌레가 길바닥을 자유롭게 누비는 것은 엄청난 문화 충격이었다... 아니 그냥 충격 그 자체였다... 바선생이 많다는 것은 이미 익히 들었지만 도착한 날 내 발 바로 아래 죽어있던 녀석을 밟을 뻔했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살아 있는 녀석 하나가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 장면을 본 순간은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 그 잡채...
낮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됐지만 밤에 더 활발해지는 선생님들을 보니 미추어버리는 줄 알았다... 타이베이 마지막 날 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살아계신 분 네 마리를 연달아 봤고 한 분은 하필 숙소 문전을 지키고 계셔서 친구들과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 늦은 새벽 시간, 웬 정신 나간 관광객의 괴성에 잠을 이루지 못한 동네 분들이 계시다면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타이동이다. 대만에서 가장 개발이 덜 된 지역이고 험준한 지형이라 서쪽에 비해서 대중교통이 원활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여행객들이 서쪽에 비해서는 적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사실 서핑을 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대만에서 서핑하면 타이베이에서 가까운 이란으로 많이 가지만 난 좀 더 사람들이 안 가고 자연이 많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게 알게 된 한 서핑 스쿨 겸 게스트하우스를 찾게 됐고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놨다.
내가 지냈던 동네는 둘란(Dulan)이라는 작은 동네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동남아 분위기가 물씬 풍겨 매우 반가웠다. 밤에는 게코가 울고 햇볕은 도시보다 따갑다. 아시안 관광객들이 넘치던 타이베이와 달리 이곳에는 백인 관광객들이 주를 이뤘다. 도착한 날 저녁을 먹었던 한 야외 바베큐 식당은 태국산 모기 기피제를 주더라. 그게 너무 반가웠다. 높은 습도의 야외에서 벌레들과 함께 차가운 맥주 한 잔을 마시니 이곳이 천국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것은 단 하나. 여기서 2박 밖에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핑을 두 번 이상은 하고 싶었는데 하다가 다치기도 해서 한 번 밖에 못했지만 서핑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작지만 예쁜 동네를 너무 짧게 왔다 가는 것이 지금도 너무 아쉽다.
둘란의 유명한 곳 중 하나는 Sintung 설탕 공장인데 일제 시대에 지어졌다가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았다. 그 이후 예술가들이 내려와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 한 곳이다. 하필 내가 갔던 때가 드래곤 보트 페스티벌을 하는 단오절이라 공장 내 펍 등이 열지 않았다.
동네는 작지만 맛집 천국이었다. 언덕을 조금 걸어 올라간 식당에는 돼지 뼈가 통으로 올라간 우육면을 파는데 먹어 본 우육면 중 제일 맛있었다. 동네 어귀의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횟집에서는 두툼한 회 15점이 고작 150NT에 불과했다. 대충 4유로, 한화로 약 5000원 정도. 당일 잡은 물고기에 따라 횟감은 달라지는데 이날은 청새치였다. 회 한 접시에 맥주 한 캔 마시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둘란을 200% 즐기지 못하고 돌아와서 아쉽다. 다음에 가면 여기에서만 일주일 있어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