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9월이 왔다. 9월부터는 기온과 상관없이 나에겐 가을이다. 아무리 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코웃음을 칠 수 있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여유롭다.
덴 듯 아픈 마음을 바라보는 나도 여유롭다. 상처는 아물 거다.
물론 가만히 있는다고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니다. 그냥 있었으면 더 심해졌을 거다. 상처받은 순간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으니까.
그동안 난 많은 심리학 자료들을 검색했다. 시작은 이 말 때문이었다. 난 나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면 당연히 했을 이 말이 나에겐 다른 의문을 남겼다.
정말 괜찮은 걸까? 내 잘못은 없을까? 그 상황이 되도록 난 뭘 했을까?
예전에는 정의되지 않았던 많은 병명들(화병 등)이 생긴 것처럼,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성향이 우세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주위 사람들은 어떤 마음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름들이 붙어있다.
어르신들은 그 명칭은 모르셨지만 삶의 경험을 통해 조금은 아셨던 거 같다. "누구는 그렇고, 누구는 그랬대."라고 하시면서 뒤에 붙여 말씀하셨던 것들이 그분들의 지혜다.
심리의 구분은 스팩트럼이고 누구도 단정 지어 이야기할 수 없지만 이 자료들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비판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노력이었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내가 왜 그랬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했다. 왜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지도 알 것 같다.
앞으로 누군가 나에게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면 그냥 괜찮은 게 아니라 왜 괜찮은 건지, 왜 그렇게 흘러갔는지, 왜 잘못이 아닌지 말해줄 수 있을 거 같다.
자신의 이익과 관계없이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존중하는 것이 마음 건강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우린 모두 이기적이고 상처가 있기에 건강하지 못하다.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건강한 집단을 만들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이 중요하다. 몸의 건강을 위해 자신을 돌아보고 필요한 운동을 하는 것처럼 마음의 건강도 그렇게 챙겼으면 좋겠다.
내가 불리한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이, 내가 모르는 나를 가장 잘 설명할 거다. 나의 마음부터 먼저 돌아봐야겠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건강한 마음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면 좋겠다. 그 사람들이 모여 행복한 우리면 좋겠다.
주말에 가족들과 인왕산 북카페에 다녀왔다. 이왕 왔으니까 인왕산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등산로로 들어갔다. 땡볕이고, 시간도 얼마 없어서 짧은 코스를 선택하기로 했다. 가다 보니 지도와 달리 갈림길들이 나왔고 우린 그때마다 도로 가까운 곳을 선택했다. 나중엔 길인지 아닌지 모를 비탈길을 내려오게 됐다.
호기롭게 앞서가던 내가 중간으로 물러서고 남편이 앞에 갔다. 난 몇십 년 만에 나무를 잡고 비탈길을 내려왔다. 남편은 중간중간 먼저 내려가서 나를 기다렸고, 아들은 뒤에서 계속 조심하라고 외쳤다.
갑자기 '나를 도와주면 되는데 왜보고만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연이어 내가 평소 했던 말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먼저 내려가 나를 보고 있는 남편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말했고, 남편은기꺼이 손을 잡아줬다.
내가 보낸 여름의 시간이 나 혼자 비탈길을 내려온 모습 같다. 사랑하는 이들이 언제든 도움을 주려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혼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작 가족들과 의논했으면 이번 여름의 일은 없었을 텐데...
신이 주신 마음이었다고 믿기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번 여름 일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혔다. 외상 후 성장이라고 할까? 그래도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