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3
금요일 고향 후배들이 포항으로 왔다. 물회도 먹고 묵혀둔 이야기가 많았다.
여모는 러시아를 찍고 인도에서 주재원으로 한참을 일하다 작년 퇴직했다. 삼십 년 전 같이 서울 살이를 시작했다. 나는 사회생활로, 그는 복학생으로. 기름보일러로 뜨근한 구의동 내 방과 세탁기가 있는 낙성대 그의 방을 주말 2호선 거의 반바퀴를 서로 다녔다. 2년 뒤에 양재역 남부터미널역 3호선 1 정거장으로 좁혔다. 돈 벌기 시작한 내가 그의 청을 두어 번 거절한 게 맘에 남아있다. 그때 폼나게 썼다면 평생 부하로 확실히 만들 수 있었는 데 하면서. 그래도 그는 여물고 착한 걸로 A급이다.
그의 동기가 있다. 고3 담임 안 선생님 큰 딸과 결혼했다. 그래서 건너 건너 가끔 선생님의 안부를 듣는다. 지구과학 전공이셨다. 선생님이 부족해 생물도 가르치셨다. 교과서를 외워야 했다. 내가 바이오와 거리를 둔 시작일 거다. 큰 키 마른 체형 당당한 걸음걸이. 누런 잠바에 기지 바지. 하얀 운동화. 평생직장이 경북 사립학교인데 고쳐지지 않은 비경상도 언어. 익숙하지 않은 운율과 언어패턴. 준엄하셨다. 까칠하셨다. 어른으로 두렵지만 따뜻함도 같이 전해졌다. 스피치의 반전 매력은 그분에서 처음 느꼈다.
이번이 마지막 소식. 3월 돌아가셨다 한다. 은퇴 후엔 보은 고향 계곡 어딘가 모자를 눌러쓰고 돌을 찾아다닐 거라 했는 데. 찾아뵈야지 한 게 몇 년인데. 생각하는 잘 삶과 거리를 못 좁히고 있는 내가 또 들켰다.
그 언제쯤 구두를 선물해 드렸다. 어린 마음에 늘 운동화 셔서. 야 내가 돈이 없어 운동화 신는 줄 아나. 난 발이 편해야 돼하시며 웃으시던 얼굴이 생각난다. 이젠 스니커즈 하나 사드리고 싶었는 데. 주말 내내 마음이 가볍지 않다. 내 이름을 기억하실 선생님들을 찾아뵈야지 하며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