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찰나
바람이 불었다.
누워 있는 이마 위로 뜨끈한 바람이 살랑였다.
K는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떠 보았다.
비스듬히 보이는 네모난 격자의 우드 프레임 창문 위로 분홍색 암막 커튼이 후루룩, 펄럭이는 게 보였다.
방 문 앞에 세워둔 선풍기의 날개가 사분의 일 쯤 혼자 돌아가는 것 같았다.
불어온 바람이 문을 나가 집 안으로, 그리고 주방을 한 김 휘감고 설거지 개수대 앞 좁고 기다란 창문을 통해 방금 나간 것 같다고 느껴지는 때였다.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던 공기청정기의 파란불이 주황빛으로 바뀌며 우우웅 하는 낮은 팬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여름의 눅눅한 공기 속 부유하던 먼지가 바람을 타고 저 친구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나 보다.
센서란 그렇게 동작하는 것일 테지.
K는 사물의 동작 원리를 되짚어보는 습관이 있었다.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사물의 본질을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 느낌을 즐기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들 보다 본질적으로 무엇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집착하는 그였다.
눈이 유독 많이 왔던 겨울이 지나가고 봄을 지나 어느새 여름에 접어든 지 오래다.
이만큼의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왠지 멈춰진 것 같은 K의 시간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K는 다시 눈을 감아 낮잠을 청해 보았다.
남들은 늙는데 나는 그대로라면, 점점 동안이 될 테니까 좋은 거지.
시답지 않은 말을 주문처럼 중얼대며 대각선으로 침대에 바로 누운 자세에서 살짝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러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사차원스러운 발상이라니, 늘 엉뚱한 말을 잘하는 Y가 떠올랐다.
Y는 초등학교 때 가방을 책상에 걸지 않았는데, 그건 책가방이 아플 것 같아서였다고 했다. 책가방이 아플까 봐 책상 옆 고리에 걸지 못했던 그 소녀는 그럼 대체 그 가방을 어디에 두고 수업을 들었을까? 의자 뒤에 걸고? 아님 안고? 선생님이 뭐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여러 궁금증을 품고 K는 Y가 그때나 지금이나 꽤나 귀여운 것 같다고 생각한다.
K와는 다르게.
K가 쉽게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K 자신이었다.
자신과 같은 또는 다른, 어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전해 들으며 사람 심리의 본질은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썼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선 뭘 원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몸을 움직여 시도해 보면 좋고 싫은 게 생길 수도 있을 텐데, K는 자신의 경험을 믿지 못했다. 신뢰할만한 누군가가 나서서 정답을 알려주길 바랬다.
학창 시절 답지 놓고 공부해서 그래. 답을 찾아가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답을 맞히는 연습을 해서 말이야. 나는 이 과열경쟁시대 치열함의 피해자야. 내 마음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
K는 위로를 그런 식으로 했다. 스스로에겐 꼭 그렇게 약간은 비겁해 보이는, 합리화하는듯한 방식을 선택하여 변명도 아니고 자기 방어도 아닌 것을 한다. 꼭 자신을 위한 것은 그렇게 반쪽짜리이다.
모난 곳이 많은 K와 많은 시간을 보내준 Y에게 고마워진다. 언젠간 Y에게 널 정말 많이 좋아한다고 고백하리라 다짐해본다.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오늘이 몇 시쯤일까 생각해 본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로, 흘러가는 초침의 움직임을 흔들리는 이마 위 머리칼에 붙잡아 본다.
곧 K는 단잠에 들었다.
꿈 속에서 K는 Y가 다녔을 것 같은 학교에 있었다.
뭔가를 찾아 길고 긴 복도를 헤매는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