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국, 행복의 기원 03
행복을 좇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질문이 하나 있다. 무엇이 있어야 행복할까? 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부분 돈, 명예, 건강 등 몇 개의 범주 안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많은 부분을 이러한 것을 가지기 위해 투자한다. 사실일까? 결국 행복은 무엇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일까?
그간의 다양한 행복 연구의 결과 이것은 큰 착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 이를테면 돈, 건강, 종교, 학력, 지능, 성별, 나이 등을 모두 고려해도 행복의 개인차 중 약 10~15% 정도밖에 설명되지 못한다. 돈은 비타민과 비스한 구석이 있어, 결핍은 문제를 만들지만 적정량 이상의 섭취는 더 이상의 유익이 없다. "그래도 더 필요해"라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기회비용 차원에서 자기 삶에 큰 솔실을 입히는 것이다.
'많이 갖는 것이 행복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연구는 차고 넘친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기본적인 의식주 조차 해결되지 않는 최빈국을 제외하면, 중진국 이상의 나라의 경우, 추가적인 경제 발전이 더 높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는 유명한 내용이다. 지난 50년간 미국의 평균 가계소득은 약 2로 증가했지만, 미국인 중 '매우 행복하다'는 답변을 한 사람은 1957년에는 53%, 2000년도에는 47%다.
부유해질수록 돈으로 행복을 사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러한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 Easterlin's Paradox'라고 한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행복지수는 상당히 높다. 흔히들 그들의 높은 소득과 사회복지시스템에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오해다. 일본이 핀란드보다 국민소득은 높지만 행복지수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낮다.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다. (핀란드는 인테리어 소품 등을 디자인했던 알바 알토의 얼굴을 화례에 새긴 나라다)
왜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가 없는 것일까?
우선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자극에도 지속적인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적응'이라는 강력한 현상 때문에 아무리 감격스러운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일부가 되어 희미해진다. 감정의 또 다른 특성은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극단적인 경험을 한 번 겪으면, 감정이 반응하는 기준선이 변해 그 후 어지간한 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범위 빈도 이혼 Range-Frequency Theory'이다.
또한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돈은 소소한 즐거움을 마비시키는 특별한 '효능'까지 있다. '음식과 맛'이라는 제목으로 위장한 한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초콜릿을 먹도록 하고 맛을 얼마나 음미하며 먹는지를 관찰하였다. 실험에 앞서 설문을 했는데, 설문지에 선명한 돈 사진을 한 장 끼워 넣은 설문지를 보여준 그룹과 돈 사진이 없는 설문지를 보여준 그룹을 나누었다. 흥미롭게도 돈 조건의 대학생들은 돈을 보지 않은 대학생보다 초콜릿을 덜 음미하며 먹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초콜릿을 더 빨리 먹었고, 표정을 분석한 결과 덜 웃으면서 먹었다.
돈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그래서 초콜릿 같은 시시한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이런 자극을 음미하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초콜릿을 우습게 생각하는 이들이 꼭 알아야 될 사실이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자료들을 보면 행복한 사람들은 이런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
돈 이외에도 여러 '인생 자원'들이 있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논리는 모두 비슷하다. 그것을 소유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보면 건강과 외모 등이다. 건강하고 예쁜 사람이 과연 늘 행복할까? 그렇다면 운동선수들과 연예인은 항상 행복해야 한다.
외모와 행복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얼굴 사진을 찍어 다른 학생에게 매력도 평가를 받았다. 최대한 과장된 매력을 해소시키기 위해 민낯으로 사진 촬영을 했고, 이 사진들을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한 장씩 보며 얼마나 예쁜지를 평가했다. 이런 절차를 통해 나뉜 외모 상위권과 하위권 사람들의 행복지수를 고려해보면 외모와 행복은 상관관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즉, 내가 다른 사람 눈에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느냐(객관적 미모)는 자신이 느끼는 행복감과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결과가 하나 나타났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정도(주관적 미모)는 행복과 관련이 있었다.
우선 우리의 뇌는 '불행하지 않은 것'과 '행복한 것'의 질적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돈과 건강 같은 것은 일상의 불편과 고통을 줄이는 데는 효력이 있지만, 결핍에서 벗어잔 인생을 더 유의미하게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는 서로 별개의 현상(긍정 부정 정서의 독립성)이라는 것이다.
우리 생각이 가진 또 하나의 허점은, 인생의 어떤 변화가 생기는 순간과 그 변화가 자리 잡은 뒤의 구체적인 경험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둘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다. 영어로 표현하지면 'becoming(~이 되는 것)'과 'being(~으로 사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재벌집 며느리가 되는 것과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아주 다른 얘기란 것이다.
그래서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지만, 실상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살면서 깨닫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행복의 '지속성' 측면을 빼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상가 라 루시프코는 우리는 "상상하는 만큼 행복해지지도 불행해지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우리는 'becoming'에 집중하며 살지만, 정작 행복이 담겨 있는 곳은 'being'이다.
이러한 현상의 주범은 '적응'이라는 녀석이고, '적응'은 생존 행위를 반복적으로 이루어 내기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사냥에 대한 의욕이 다시 생기기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 오늘 고기를 씹으며 느낀 쾌감이 곧 사라져야 한다. 쾌감 수준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초기화 reset'과정이 있어야만 그 쾌감을 유발한 그 무엇(고기)을 다시 찾는다.
이렇듯 쾌락은 생존을 위해 설계된 경험이고, 그것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본래 값으로 되돌아가는 초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이라도 여러 번 지속적으로 느끼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