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명교 Jun 11. 2020

사회운동정당이냐 대중정당이냐는 부당대립이다

정의당을 사회운동정당으로 개조하기 위해

“진보정당은 사회운동정당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흔한 반론 중 하나는 “사회운동정당이 아니라, 대중정당(혹은 지지자 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사회운동정당-대중정당으로 설정된 대립항에 ‘아마츄어리즘-프로패셔널리즘’의 등호를 붙이고, ‘운동권-대중’의 가짜 대립까지 갖다붙인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는 ‘사회운동’을 ‘정치’와 대립시키고, 나아가 정치를 대중으로부터 멀게 하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무엇보다, 허수아비 때리기다.

 

우선 사회운동은 광장과 거리, 지역과 일터 등 삶의 현장을 주요한 무대로 삼지만, 기성 정치와 결코 무관하지도 않다. 흔히 기성 정치에서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사회적으로 크게 확장된 요구들에 대해서만 유의미하게 반응할 뿐, 좀처럼 정책적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일부 자유주의 정당의 정치인이 ‘착한 마음’으로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온갖 이익집단과 자본의 로비에 의해 다시 회귀하는 게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 정당의 속성이다.


더구나 사회운동은 무엇보다 ‘프로패셔널’해야, 성공할 공산이 높다. 대중적인 저항으로 폭발하기 전까지 사회운동은 미디어와 기성 정치, 아카데미가 지배하는 사회적 담론 구조에 개입하기 위해 발군의 프로패셔널함을 필요로 한다. 나아가 사회운동의 핵심 ‘활동가’를 지칭 혹은 멸칭하는 ‘운동권’ 집단은 그들이 자유주의 정치세력에 투항해 변절하지 않고 좌파 정치세력의 스펙트럼 위에 머무르는 한, 언제나 대중들 속에서 존재하고 대중들로부터 요구를 조직하며, 다시 대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을 조직한다. 그러니 ‘사회운동정당’을 ‘대중정당’이란 개념과 대립시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논거는 상당수 잘못됐다.


역사적으로 사회운동이 고조하는 시기에는 ‘사회운동정당’과 ‘대중정당’이 대립적 개념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사회운동의 성장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당이 충분히 대중적 표상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1920년대 독일 사민당은 충분히 사회운동적이면서 대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도시의 호프는 노동자들의 사교가 이뤄지는 현장이면서 정치 토론의 핫플레이스였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에 있는 무수한 노동회관들도 진보정당과 사회운동, 지역을 연결하는 장소였다. 이는 충분히 사회운동적이면서 대중적이었다. 두 시기 진보정당 역시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제대로 된 사회변혁의 입장을 견지하지 못해 분열과 오류를 반복했지만, 사회운동적이면서 대중적인 정당 조직의 양태가 얼마든 가능하다는 것은 무수한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운동정당이란 사회운동이 존재하는 사회의 광범한 대중을 포괄하며, 선거 과정에서 지지 대중의 뜻을 조직하고, 파업‧시위‧선거 등 정치적으로 표현한다. 반면 2010년대 초반의 한국과 같이 사회운동이 위기를 겪는 시기에는 사회운동정당과 대중정당은 대립적 형태로 인식된다. 이런 대립은 특히 ‘선거’에 대한 관점에서 드러난다. 사회운동정당은 선거 이외의 활동을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대중정당에서 선거는 중심에 놓인다. 하지만 사회운동정당이 선거와 무관한 정당을 뜻하진 않고, 오히려 선거 시기를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활용하기도 한다. 오히려 선거는 대중투쟁의 성과를 폭발시키기도 하고, 일정하게 수렴하기도 하기 때문에, 사회운동정당에게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하다.


정당이 사회운동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중의 목소리를 기울이고, 그것의 목소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대표하고 구현하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사회운동정당-대중정당의 분별은 부당대립이다. 이는 오히려 좌파로 하여금 그 원인에 대해 질문할 필요성을 상기한다. 사회운동이 왜 퇴조하였는가? 그것이 불러온 구체적 양태는 무엇이며, 좌파정당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 사회는 미국이나 칠레 등 아메리카 대륙에서 사회운동이 고조되고 있는 것과 달리, 사회운동의 지난한 침체기를 겪고 있다. 2016-17년 박근혜 퇴진 촛불 항쟁은 거대한 대중투쟁이 되어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냈고, 2018년과 2019년에도 중요한 노동자 투쟁이 있었지만, 촛불 항쟁 자체의 연합 전선으로서의 성격과 문재인 정부 시기 이 무형의 연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나아가 노동자운동이 새 정권에서의 자기 역할을 명백하게 짚어내는 것에 성공하지 못하면서, 덩달아 대중 투쟁이 고조될 가능성 역시 줄어들었다. 2018년 이후 정의당이 맞이한 일정한 침체, 진보정당으로서의 포지셔닝의 위기는 정의당 스스로 조직 혁신을 지연시키면서 발생된 측면도 있지만, 사회운동이 처한 객관적인 조건의 위태로움과도 맞닿아 있다.


사회운동이 침체된 시기에 ‘사회운동정당’을 표방해온 정당이 전략적 관점을 고수하고 선거에 대응하려면 사회운동을 강화해야만 한다. 즉, 원내에서의 실천 전략과 활동 모두 사회운동의 강화를 위한 것인 셈이다. 다시 말해, ‘사회운동 정당으로의 지향’이 의회정치를 무시하거나 방기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좌파 대중정당은 제도(개혁)라는 조건을 지렛대 삼아 대중운동을 강화함으로써 이를 사회변혁의 토대로 삼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대중운동 성장이라는 조건 없이 의회 정치에 치중하려 했던 편향을 극복해야 한다. 물론 진보정당이 대중운동이 성장하기를 기다리며, 소만 키우고 있을 순 없다. 모든 조직은 악조건에서도 자기 혁신의 계기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목표와 지향을 갖고, 전면적인 혁신의 메스를 가하지 않으면 이런 방향 선회는 결코 쉽지 않다. 그건 일반적인 기업 조직이 좀처럼 혁신의 모멘텀을 만들기 힘든 것과 다르지 않다.

정의당이 ‘사회운동적’이지 않을 때의 한계는 명백하다.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운동의 목소리와 능동적으로 조응하지 못함으로써, 정의당이 주요한 지지층으로 삼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데 한계를 드러내며, 제도정당의 틀을 통해 사회변혁에 복무한다는 운동의 기조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정의당이 ‘의회정당’의 틀 안에 갇히게 될 때, 정의당의 의정 활동은 시민사회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요구를 수렴하는 민원창구로 역할이 축소된다. 이런 한계 내에서는 ‘을지로위원회’나 다른 여러 포석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왼쪽 블록을 집어삼키려 하는 민주당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조건을 형성한다.


나아가 실제 정의당 내 조직 체계의 대다수과 원내와는 무관한 ‘원외’와 ‘지역’과 연루되어 있음에도, 사회운동적/지역적 비전과 실천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당조직의 골간 전반이 국회의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는 수동적인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6명의 국회의원 의정활동을 중심으로 당의 자원이 배치되면 자연스럽게 지역위원회와 시도당을 포함한 당 전체는 의정활동 지원이 핵심사업이 되고, 이것은 당의 팬덤정당화를 가속한다. 그 반대가 되거나 최소한 원내외 활동의 균형이 필요하다. 이 균형점을 잡는 데에는 정세적 판단이 중요한데, 21대 국회에서 177석 거대여당 하의 6석은 원내 정치에 대한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조건이다. 따라서 원내 활동 중심이 아니라 당의 체질을 사회운동적으로 전환하고, 지역과 현장에서 다른 방식의 영향력을 실현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21대 국회에서 정의당 원내 정치는 의석수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구도상 20대 때보다 더욱 협소한 역할 밖에 자임할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당을 더욱 사회운동적으로 혁신하고, 나아가 사회운동 자체를 강화하는 것에 성장 전략을 역점에 두고 사고해야 할 필요성을 가져오는 것이다. 정의당이 이런 난맥상을 극복하고 진보정당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사회운동정당으로의 전환을 위해 구체적인 혁신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은 이후 차근차근 밝히고자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