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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태모의 포랍도 Jan 09. 2022

보부아르와 자자, 앨그런, 미르달

[사람과 사상] 1월 9일

1908년 1월 9일, 20세기 페미니즘의 아이콘이며, <제2의 성性(Le Deuxième Sexe)>을 비롯한 흥미로운 저작을 많이 남긴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빠리에서 태어났다.


보부아르는 어린 시절 어느 정도 유복하게 컸으나, 자라면서 가계는 점점 기울어 갔다. 이러한 물질적인 조건의 변화가 오히려 그의 독립적인 삶을 예비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여느 중산층 젊은 여성처럼 안정적인 결혼을 위한 지참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 동생과 함께 있는 어린 보부아르의 모습 (오른쪽)


독립적인 작가, 선생, 지식인으로서의 보부아르의 삶은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의 삶과 많이 달랐다. 그는 프랑스 최고의 교육 기관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남자 수재들과 함께 공부했고, 교수 자격시험(agrégation)도 최연소에 차석으로 통과했다. 그 세대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랬던 그가 소위 '평범한' 여성들의 삶을 체험하고 그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나치스의 점령 때문이었다. 점령기에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심하게 통제된 까닭이다. 사회에서 부여한 '여성'의 역할을 더 극명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제2의 성性>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라 하겠다.


보부아르가 깊이 교류했던 여러 학자나 문인들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그의 단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르트르와의 관계가 보통 가장 큰 이야깃거리다. 그런데 보부아르의 첫 단짝은 자자(Zaza)라는 애칭의 친구 엘리자베스 라꾸앙(Élisabeth Lacoin)이었다. 보부아르보다 훨씬 더 종교적이고 더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자자는 억압과 구속이 심했던 만큼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더 컸고, 자신의 부모와 부모가 대표했던 당시 부르주아 문화에 강하게 저항했다. 비록 저항에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런 자자는 보부아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자는 연인과의 결혼이 좌절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뇌염을 얻어 요절했는데(정확한 사인은 한참 후에야 알려졌다), 그의  이른 죽음으로 보부아르는  내상을 입는다. 자자의 짧았던 삶과 그가 품었던 여러 생각은 보부아르에 작품에 이런저런 모티프가 된다. 보부아르는 자자와 자신의 성장기를 1954 소설로   있었지만 끝내 출판하지 않았었다.  미출간 원고가 지난 2020년에 <Les inséparables> 출판되었다.


자자와 함께 결혼을 꿈꿨던 사람은 나중에 현상학의 대가가 되는 모리스 메를로-뽕띠(Maurice Merleau-Ponty)다. 보부아르는 메를로-뽕띠와 고등사범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했었다. 자자와 메를로-뽕띠의 결혼이 좌절된 것은 자자 부모의 반대 때문이었는데, 메를로-뽕띠가 옛날 식 표현으로 사생아였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여담으로 한국 학자 중에 메를로-뽕티를 유난히 좋아했던 분이라면 단연 정화열 선생님이 떠오른다. 언젠가 동서양의 횡단하는 비교철학을 주제로 한 본인의 책 표지에 출판사가 공자와 푸코의 얼굴 그림을 대표로 넣자, 푸코를 메를로-뽕티로 바꿔달라고 주문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 기억이 난다.)



보부아르(왼쪽)와 그의 단짝 자자



20세기 최고의 페미니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제2의 성性>은 1949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책의 배경에 관하여 자주 간과되는 사실 하나가 있다. 바로 보부아르의 미국 여행이다. 보부아르는 47년부터 미국을 몇 번 방문하는데, 그가 관광객으로 미국의 겉모습을 훑어본 것이 아니라 숨어 있는 여러 진면목을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작가 넬슨 앨그런(Nelson Algren)의 도움 때문이었다. 보부아르와 앨그런은 금세 가까워졌고,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사르트르와 자유분방한 관계를 실험 중이던 보부아르와 사회 문제에는 급진적이었으나 연애/성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던 앨그런의 관계가 끝까지 지속되기는 어려웠으나, 보부아르는 앨그런이 준 반지를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보부아르가 <제2의 성性>을 쓰는 시점에 너무도 전통적인 미국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은 본인에게도 다소 흥미로운 모순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그가 앨그런과 나눈 편지에는 그런 느낌이 더러 묻어 나온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보부아르의 준(準) 자전적 소설 <만다린 Les Mandarins> 속에 나오는 루이스 브로건(Lewis Brogan)의 실제 모델이 앨그런이다.



1947년 미국 방문 시에 보부아르와 앨그런



미국을 알게 되면서 보부아르는 스웨덴 출신 경제학자 게너 미르달이 쓴 <미국의 딜레마>를 탐독한다. 1944년에 출판된 이 책은 미국 내 흑인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의 구조적 문제를 분석한 천 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다. 미르달은 카네기 재단의 후원으로 수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 책을 썼다. 보부아르는 빠리로 돌아와 앨그런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르달의 책을 열정적으로 읽고 있다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미르달이 흑인들에 대해서 쓴 이 두꺼운 책 못지않게 중요한 책을 내가 써야겠어. 여기 보니까 흑인들의 지위랑 여성들의 지위 간의 유사성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네." (1947년 12월 1일)



미르달의 수작인  <미국의 딜레마>


실제로 미르달의 책 맨 마지막에는 그의 부인 앨바 미르달이 쓴 연구에 기반한 "흑인 문제와 유사한 문제"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물론 그 유사한 문제란 여성 문제, 젠더 문제다. 사실 미르달 부부는 <미국의 딜레마> 후속으로 젠더 불평등을 고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했으나 연구비를 얻지 못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性>에서 "한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여성 주체를 고정화된 발달 패턴에 가두는 사회, 그래서 개개인이 기계적이고 환원론적인 정체성에 갇혀 버리는 사회, 자신의 단짝 자자를 억누른 사회, 보부아르는 이런 사회를 폭로하고자 했다. 당연하게도 그의 화두는 독립과 자유였다.


물론 <제2의 성性>은 <미국의 딜레마>와 같은 사회과학서가 아니며, 보부아르 접근은 보다 철학적, 문학적, 사회학적이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만남이--그것이 앨그런이라는 사람과의 만남이든, 그와 함께 누빈 시카고의 뒷골목에서 맞닥뜨린 것이든, <미국의 딜레마>를 읽은 독서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든 간에-- 보부아르에게 끼친 영향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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