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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태모의 포랍도 Jan 29. 2022

직업 정치 실패자의 직업 정치론?

[사람과 사상] 1월 28일 | 베버의 Politik als Beruf

1919년 1월 28일, 독일의 정치경제학자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 Politik als Beruf>라는 주제로 뮌헨에서 강연을 했다. 베버를 연사로 초청한 것은 자유 학생연맹(Deutsche Freie Studentenschaft) 바바리아 지부 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은 이미 1917년 여름에 베버에게 학자의 일/학문에 대한 강연을 부탁한 바 있었다. 그때 베버가 했던 강연이 바로 <직업으로서의 학문 Wissenschaft als Beruf>이다. 베버의 두 강연은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학 안팎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 두 강연은 늘 인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지난 십수 년 간을 돌아보아도, 여러 교수, 평론가, 정치인들이 <직업으로서의 정치>의 내용을 피상적으로나마 종종 인용해왔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베버의 입을 빌려, 훌륭한 정치인은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다.


강연의 구체적인 내용을 따지기 전에, 나는 여기서 베버가 학생들의 초청을 수락하여 연사로 나섰던 그때 당시의 맥락을 살펴보려고 한다.


모든 역사적 사건을 이해할 때는 먼저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를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강연이 있었던 시점의 독일의 상황은 어땠을까?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끝났다. 독일의 제2제국이 사라졌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소멸했다. 베를린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는데 곧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불씨는 뮌헨에도 퍼졌고, 독립 사회주의자들의 지도자 격이었던 아이스너(Kurt Eisner)는 바바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는 한편, 전후 독일은 새로운 실험을 감행했다. 새 헌법을 쓰고 자유주의 공화국을 세우려는 시도였다. 베를린의 자유주의자 프로이스(Hugo Preuss)가 헌법 구성 위원회를 이끌었고 그가 베버를 초청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정치는 언제나 베버의 큰 관심이었다. 그는 새 공화국에서 의회 진출을 노렸으나 당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했다. 다시 말해, 1919년이면 당시 55세였던 베버가 직업 정치인이 될 가능성은 거의 완전히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강연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같은 집단의 초청으로 1917년에 연사로 나섰던 <직업으로서의 학문> 강연 때도 비슷한 아이러니가 있었다. 당시 베버는 53세였고, 대학을 떠난  거의 20년이 되어 가던 때였다. 그가 하이델베르크 경제학과 교수직을 그만둔 것이 1899년이었기 때문이다. 베버가 프라이부르크 경제학과 교수로 처음 임용된 것이 1894년이었으니, 그가 정식으로 교수 생활을  것은 5년이 전부였다. 그전에 사강사(Privatdozent) 지냈던 시기를 합한다 해도 그가 직업으로서 학문 활동을 했던 것은 10 남짓이다. 1899 이후의 베버는 직업 학자가 아니었다. 학문은 그에게 직업/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부인 마리엔느 덕택에 그는 일을 하지 않아도 경제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베버는 애초부터 부유한 집에서 자랐다. 베버 부모 재산의 90% 어머니  팔렌 슈타인 Fallenstein 집안의 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베버는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독립을 해야 했고   목표를 이루었다. 마리엔느가 상속으로 받은 재산 덕이었다.  부의 출처는 마리엔느의 외할아버지  다비드 베버였고,  사람은 사실 막스 베버의 큰아버지였다. 그러니까 베버 부부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5 지간이다. (참고로 말년에 베버 부부의 재정 상태가 나빠진 것도 사실이며, 베버는 이즈음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도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려했었고 실제로 1919 5월에 뮌헨대학 교수직을 맡아 1920 6월까지 가르쳤다.)


따라서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읽을 때, 이 강연을 쓴 사람이 직업 학자를 그만둔 지 꽤 오래된 사람이라는 것을, 직업 정치를 제대로 해볼 기회를 얻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 학생연맹이라는 단체는 어떤 맥락에서 베버를 초청했던 것일까? 우선 이 집단은 독일 식 교양과 도덕 교육, 학문의 자유, 지식 그 자체를 위한 연구를 지향하는 단체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학문의 풍토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장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정치 관료들이 학문의 영역을 침해하는 일이 잦았고, 자본주의 경제 논리 역시 학계에 깊숙이 침범했다. 학문의 전문화와 분절화 분위기 속에서 대학의 높은 이상은 쉽게 간과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계의 내부자면서도 외부자이기도 했던 베버는 이상적인 대학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비쳤을 수 있다. 한 예로 베버는 정치 당국의 이해에 따라 교수 임용 문제를 처리했던 프러시아의 문화/교육부 장관 알토프(Friedrich Althoff)를 맹공격했던 바가 있었다.


물론 베버는 고고한 이상론을 펴는 복고풍의 학자는 전혀 아니었다. 그는 국가 권력에 밀착해 있는 대학과 교수들을 비판하는 한 편, 고상하게 대학의 전인적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유사 예언자 풍의 교수들도 비판했다. 베버는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의미와 선과 진리에 대한 총합적인 설명이 무너지는 당시 상황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확고한 보편적 지식과 가치를 강렬하게 추구하도록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추구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 또한 늘 강조했다. 이러한 베버의 성향이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강연을 맡게 된 배경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의 경우, 자유 학생연맹은 혼란스러웠던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하여 베버의 식견을 얻고자 했다. 베버가 보기에도 독일은 국가 관료 시스템 전체를 성찰하고 재정비해야 하는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베버는 과거 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뿐 아니라 당시 여러 새로운 혁명적 시도 역시 비판했다. 특별히 아이스너와 같은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이 정책적 대안 없이 구원의 수사만 남발하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베버가 보기에 새로운 독일에 필요한 리더는 외국 자본과 극우 집단들을 모두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잘 훈련된 사업가 형 정치인이었다. 사실 베버는 처음에 이 강연 요청을 고사하면서 다른 사람(Friedrich Naumann)을 추천하려 했는데 결국 이에 응했던 이유중 하나가 자유 학생연합이 베버가 자신들의 요청에 불응할 경우 아이스너를 대신 초빙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정치 활동의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논한 것이 바로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강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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