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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태모의 포랍도 Apr 24. 2024

칸트 탄생 300 주년

[사람과 사상] 4월 22일 | 마흔다섯이 넘어 교수가 된 칸트

오래전 일이다. 학부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교수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행사가 있었다. '사은회' 비슷한 이름의 행사였던 것 같다. 당시에도 학생들이 갹출을 해서 교수들 식사 대접을 한다는 착상 자체를 좀처럼 이해할 수는 없었는데, 같은 학과 대학원 진학이 이미 결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참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어떤 대화와 덕담이 오고 갔는지 다른 것은 기억에 없는데, 한 가지 선명한 장면이 있다.


은퇴를 앞둔 S교수가 내 맞은편에 앉았는데, 그 옆에 앉은 나를 아는 K교수가 "이번에 대학원에 올 애"라고 나를 소개했다. 그 소리를 들은 그분이 내게 대뜸 "교수가 되고 싶냐?"라고 물었다. 그러더니 내 전공을 묻고, 내가 정치사상을 공부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정치사상을 전공해서는 절대로 교수가 될 수 없어!"라고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는 저쪽에 있는 학생 한 명을 가리키면서 "쟤도 정치사상을 하겠다고 했다가 내 말 듣고 전공을 바꾸기로 했지"라고 첨언했다. 그는 나보다 3년 선배로 이듬해 나와 함께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나야 당연히 적당하게 둘러 댈 대답이 없어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는데, 옆에 앉은 Y교수가 앞으로는 사정이 좀 나아질 수 있지 않겠냐고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S교수는 사뭇 완강했다. "지난 40년간 한 번도 좋은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40년간 절대 좋지 않을 것이라"라고 단언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의 오지랖이자 선견지명이자 허튼소리에 대해 간혹 생각하곤 한다.


오늘 칸트 탄생 300주년을 맞아 공교롭게도 이 생각이 난 것은, 칸트야 말로 교수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724년 생 칸트는 그가 큰 영향을 받았던 선생님이었던 크누첸 교수(Martin Knutzen, 1713-1751)가 사망한 뒤, 모교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그 자리를 노리고 도전했다가 실패했었다. 1758년, 그가 잠시 함께 살기도 했던 큅케 교수(Johann David Kypke, 1692-1758)가 사망하자 그는 이 자리도 도전했다. 이 때는 마침 유럽에서 7년 전쟁(1756-1763)이 벌어지던 때였다. 쾨니히스베르크는 1757년부터 러시아의 지배 하에 놓였다. 칸트는 1758년 당시 러시아의 여황제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을 그 자리에 임명해 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썼고, 최후 2인의 후보자 대열에 끼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마지막에 실패하고 만다. 그때 칸트 대신 임용된 사람은 크누첸 선생의 애제자 북(Friedrich Johann Buck, 1722-1786)이었다.


정해진 봉급 없이 강사(Privatdozent)로서 수업료 만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이 시절 칸트는 논리학, 형이상학, 도덕 철학에서부터 지리학, 요새 축성술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수업을 주 22시간가량 했어야 했고, 부수입을 얻기 위해서 사서보 일을 겸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 기간 동안 저술 활동이 상대적으로 뜸한 것도 이해할만하다.



진짜 기회가 찾아온 것은 1770년이었다. 당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수학과장 랑한센 교수(Christoph Langhansen, 1691-1770)가 사망하여 공석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그 자리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칸트는 이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시학 교수 제안이 왔었지만 거절했었고, 프러시아 바깥의 에어랑겐 대학과 예나 대학에서 온 초빙 제안 역시 모두 거절했었다. 아마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논리학이나 형이상학, 또는 도덕철학 교수가 되는 것이 그의 지상 목표였던 것 같다.


명민한 칸트는 수학과장 자리가 열린 이 기회를 십분 이용했다. 베를린 당국에 편지를 보내 당시 도덕 철학을 담당하던 크리스티아니 교수(Carl Andreas Christiani, 1707-1780)를 수학과장 자리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크리스티아니는 랑한센의 사위이기도 했다. 수학과장은 관습에 따라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딸린 중등학교 교육도 맡게 되고 그에 따르는 혜택도 있으니(칸트가 그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입학 자격을 평가받을 때 시험관이 바로 랑한센 교수였다), 크리스티아니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으리라는 점이 칸트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되면 크리스티아니의 자리는 본인을 임명하면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주도면밀한 칸트는 두 번째 안도 함께 제시했다. 큅케 교수의 자리를 놓고 칸트와 경쟁하여 이겼던, 그래서 당시 논리학/형이상학과장 자리를 맡고 있던 북 교수를 수학과장으로 임명하고, 본인을 논리학/형이상학과장으로 임명하라는 것이었다. 북 교수와 이 문제로 서로 상의한 바는 없었다.


칸트의 작전(?)이 이번에는 성공했다. 결국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제는 칸트를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논리학/형이상학 교수로 임명한 것이다. 그의 46번째 생일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제 칸트는 강의 시간도 주 16시간 정도로 줄일 수 있고, 처음으로 정해진 봉급을 받게 되었다. 사서보 일도 곧 그만두었다. 교수가 됨에 따라 아침 7시부터 공개 강의를 해야 해서 뜻하지 않게 일찍 일어나야 했던 어려움을 제외한다면, 전보다 안정적인 학자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은 그로부터 11년 후인 1781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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