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프로젝트> ⑱ 그리스어 배우기
“It’s all Greek to me.” 혹은 “That’s Greek to me.”란 말이 있다.
내 이해력을 넘어서는, 도무지 모르겠는 상황일 때 쓰는 영어 관용구이다. 단순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는 말이 완전 이해불가하다는(The way you’re speaking right now is incomprehensible.) 뜻이다. 예를 들어 “This new computer program is all Greek to me”에서처럼 컴퓨터 프로그램과 같은 외계어(!)를 마주했을 때의 표현이라고 할까?
이 말은 중세시대에 라틴어를 쓰는 로마의 수도사들이 고대부터 내려오던 그리스어를 필사하면서 모르는 부분에 대해 “이것은 그리스어입니다. 읽을 수 없습니다”라고 쓴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599년 셰익스피어가 희곡 「줄리어스 시저(The Tragedy of Julius Caesar)」에 사용하면서 일반화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파벳이라고 하는 것은 기원전 400년 경 그리스 식민지였던 이탈리아 남부에서 퍼져나가 자체적으로 발전한 라틴어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정작 모국인 그리스는 서유럽과 다른 ‘유클리드 알파벳’을 사용한다. 유클리드 알파벳(euclidean alphabet)은 모음과 자음을 가진 최초의 알파벳 문자인데, 알파(Α)에서 오메가(Ω)까지 이어지는 24자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어 쓰기의 기본이 되고 있다. 물론 ‘알파벳’이란 영어 단어 역시 그리스어 알파(Α, α)와 베타(Β, β)에서 유래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 유클리드 알파벳 24자의 대문자와 소문자는 다음과 같다.
Α α , Β β , Γ γ , Δ δ , Ε ε , Ζ ζ , Η η , Θ θ , Ι ι , Κ κ , Λ λ , Μ μ , Ν ν , Ξ ξ , Ο ο , Π π , Ρ ρ , Σ σ /ς, Τ τ , Υυ , Φ φ , Χ χ , Ψ ψ , Ω ω .
그리스어는 4천년 이상의 오랜 세월 동안 사용된 언어로서 많은 변화와 부침 끝에 오늘날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고대에는 아티카 지방의 방언(Αττική)이 표준언어로 사용되었고, 이후 코이네(κοινὴ)라 불리는 새로운 방언을 흡수하여 사용했다. 이후 중세기를 거쳐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1834년 무렵에 아티카 그리스어의 정제된 형태인 카타레부사(Καθαρεύουσα, ‘순수한 것’이라는 뜻)가 공식어로 지정된다. 그러나 많은 문인들은 카타레부사가 경직되고 인공적이며 죽은 언어라고 여겨 사용하기를 거부했다. 당시 문인들과 서민들은 그리스의 지방 언어와 유럽(특히 터키) 언어를 흡수한 형태인 디모티키(Δημοτική, ‘민중의 말’의 뜻)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42년 동안 언어 사용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이 이어졌고1976년 군부독재가 끝나고 나서야 디모티키가 그리스 공식 언어로 지정되어 오늘날의 현대 그리스어 형태로 정비되었다. 디모티키로 글을 쓴 작가로 『그리스인 조르바』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유명하다. (『그리스어 첫걸음』 참고)
현재까지 그리스어는 ‘고대 그리스어’와 ‘현대 그리스어’ 두 개로 여전히 살아 있고, 그리스의 학교에서도 현대 그리스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함께 가르치는 등 서로 조금씩 주고받으며 진보해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 그리스어를 ‘헬라어’나 ‘희랍어’ 등의 이름으로 몇몇 신학과나 고전 교양과목 등을 위한 강의로 열리고 있다. 현대 그리스어를 정식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그리스슬라브어과가 유일하다.
고대 희랍어에 수동태와 능동태 말고 제3의 태가 있다는 것, 지난 시간에 잠깐 설명했지요?
… 우리가 중간태라고 부르는 이 태는,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합니다.
…
예를 들어 ‘사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을 사서 결국 내가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다’라는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인가를 사랑해서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됩니다. 영어에 ‘kill himself’라는 표현이 있지요? 희랍어에서는 himself 없이 이 중간태를 사용해서 한 단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고 말하며 남자는 흑판에 쓴다.
διεφθἀρθαι.
흑판에 적힌 문자들을 곰곰이 올려다보다가 그녀는 연필을 쥔다. 공책에 그 단어를 옮겨적는다. 이렇게 규칙이 까다로운 언어를 그녀는 접해보지 못했다. 동사들은 주어의 격과 성의 수에 따라, 여러 단계를 가진 시제에 따라, 세 가지 태에 따라 일일이 형태를 바꾼다. 놀랍도록 정교하고 면밀한 규칙 덕분에 오히려 문장들은 간명하다. 주어를 굳이 쓸 필요도 없다. 어순을 지킬 필요조차 없다. 삼인칭의 한 남자가 주체이며, 언젠가 한번 일어난 일임을 나타내는 완료시제를 쓴, 중간태에 따라 변화된 이 한 단어에 ‘그는 언젠가 자신을 죽이려 한 적이 있다’는 의미가 압축돼 있다.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18~20면)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2011년 문학동네에서 첫 발간된 후 2021년까지 25쇄를 찍은 소설이다. 『채식주의자 The Vegetarian』의 인터내셔널 부커상 수상 이후 『소년이 온다 Human Acts』, 『흰 The White Book』에 이어 4번째 영어 번역서인 『희랍어 시간』은 올해 4월 데보라 스미스와 에밀리 예원의 번역으로 Hamish Hamilton, Hogarth 출판사 등에서 『Greek Lessons』으로 발간되면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가디언 등지에서 일제히 기사화하는 등 큰 관심을 받았다.
아이 양육권을 뺏기면서 말하는 능력을 잃은 한 여성이 ‘자신의 의지로 언어를 되찾고 싶어서’ 고대 그리스어 수업을 들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침 그리스어 강사는 점점 시각을 잃어가는 남자로, 세상의 이방인으로 사는 두 남녀는 고립에서부터 몸과의 연결, 서로와의 연결로 이동하면서 시적인 유대를 형성하게 된다.
- 동기가 어떻든,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와 말의 속력이 대체로 느리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죽은 말, 구어口語로 소통할 수 없는 말이라서일까요. 침묵과 수줍은 망설임, 덤덤하게 반응하는 웃음으로 강의실의 공기는 서서히 덥혀지고, 서서히 식어갑니다. (40면)
- 희랍어는 달랐어. 라틴어를 곧잘 하는 친구들도 희랍어의 문법에는 두 손을 들었으니까. 바로 그 복잡한 문법체계가 - 수천 년 전에 죽은 언어라는 사실과 함께 - 나에겐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졌어. (119면)
『희랍어 시간』은 수년간의 고립과 심리적 트라우마를 견디던 두 사람이 이해와 수용, 관계를 맺어나가는 우화의 틀거리를 하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말과 언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까다로운 시제, 명사들의 격변화, 복잡한 태의 용법들’로 배우기 힘든 그리스어를 통해 특히 ‘단어 하나에 다층적 의미가 포함될 수 있음으로 해서 언어의 부피를 한 단어로 좁힐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말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세계를 더욱 다차원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1925년에 창간, 100년 가까이 뉴요커들의 주말을 채워주고 있는 「뉴요커」 지에서 40년 넘게 교열자로 일하면서 원고를 인쇄 직전까지 책임지는 사람을 뜻하는 오케이어(OK’er)이자 ‘콤마퀸(comma queen)’이란 별명을 얻게 된 메리 노리스((Mary Norris, 1952~). 『뉴욕은 교열 중』(2018, 마음산책)을 통해 영어 작문의 끝판을 보여준 바 있는 ‘단어광’이자 ‘교정 성애자’ 메리 노리스의 두 번째 책은 알파벳의 기원인 그리스어와의 만남을 보여주는 『그리스는 교열 중』(2019, 마음산책)이다.
“읽을 수 있어요?” 난 놀라서 말했다. 다른 알파벳으로 쓰인 언어를 깨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나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그는 대답하면서 허리를 폈고, 그의 안과 속 파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시 초점을 맞췄다.
그리스어 문장을 해석하는 에드를 보면서 나는 헬렌 켈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스어를 이해할 수 있겠구나! (17면)
직장 동료를 통해 그리스어를 처음 접한 메리 노리스는 이후 NYU 평생교육학교에 등록해 본격적인 그리스어 탐험에 들어간다. 영어 속에 그리스어가 얼마나 스며들어 있는지 확인하고는 현대 그리스어를 어느 정도 익힌 후 장기근속 휴가로 첫 그리스 여행을 떠난다.
특유의 유머와 세상 모든 호기심을 다 끌어안은 듯한 메리 노리스의 그리스 여행은 토마토 농장 주인과의 말도 안 되는 ‘썸’을 타다가 실수하기도 하고, 여자 혼자 지중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어떻게 비치는지 이해하면서 당당히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경험한다.
귀국 후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기 위해 컬럼비아 대학의 고대 그리스어 초급반에 등록한 후에는 본격적인 그리스어와의 동행을 시작한다. 그리스 비극과 고전을 다 읽으리라 결심하면서 그리스어에 빠져드는 과정을 모조리 경험하게 된다.
입안에서부터 머리까지 그리스어의 에로틱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섹시한 그리스어’를 탐구한 메리 노리스의 이 책은 고전부터 현대, 단어와 일상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그리스어에 대한 인문학적, 지적 파노라마와 같으며, 또 한편으로는 중년 여성 혼자 떠나는 재밌는 그리스 여행기이기도 하다.
외국어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한 창문 하나를 시원하게 열어 젖히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스어를 공부해 보기로 결심하고 알파 베타를 처음 외우기 시작한 날은 코로나로 한창 재택근무를 하던 2020년 5월 5일이었다. 현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곳이 (한국외국어대를 제외하고) 전무한 상황에서 그나마 『그리스어 첫걸음』(ECK북스)이라는 책 한 권을 믿고 겁도 없이 시작했다. 처음 계획으로는 일주일에 세 시간 정도 공부해서 200시간 정도면 그리스에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알파베타를 외우는 데만도 몇 개월이 걸릴 정도로, 그리스어는 낯설고 습득하기 어려웠다. 진도가 통 나지 않으니 공부도 탄력을 잃어 그 후 몇 번씩 그만 뒀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여러 번, 총 15과 중 11과까지 나가고 현재 스탑중.
그리스어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가 안다고 여겼던 단어들, 예를 들어 멘토, 에고, 이데아, 메가, 마이크로, 유레카와 같은 단어들이 모두 그리스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되고, 우라노스(하늘), 앙겔로스(천사), 일리오스(태양), 누메로(번호), 떼아뜨르(극장), 비블리오(책), 프루또(과일), 옥토푸스(문어) 등 신화나 외국어를 통해 알았던 단어들의 기원이 그리스어라는 데서 다시 한번 더 놀라게 된다. 아직도 IT나 자연계열에서는 그리스어를 기반으로 하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새로운 기계나 문물 등의 이름을 만들 때도 어김없이 그리스어에서 따오는 경향이 있다(며칠 전엔 WHO에서 새로운 코비드(Covid) 변종의 새 이름으로 불화와 투쟁의 그리스 여신인 에리스(Eris)로 정했다고 한다).
아마 오늘을 계기로 다시 알파 베타 외우는 것을 시작하지 않을까 싶은데, 15과까지 다 외운다고 해도 활용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현대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데 요즘은 유튜브도 많이 나와 있고, 특히 영어 유튜브와 구글 번역 등을 적절히 활용하고, 그리스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알파 베타에 도전하며 15과까지 마스터 하는 날에 다시 한번 더 기록해 둬야겠다.
*표지그림: Dipylon 비문 , 그리스 알파벳 사용의 가장 오래된 알려진 샘플 중 하나 c. 기원전 7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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