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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주 Aug 03. 2023

만삭의 몸으로 지지향에 왔다.

파주 북스테이 지지향에서 머문 4일

올여름 휴가지에 대한 고민을 별로 안 했다.

이전에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지혜의 숲>을 방문하며 언뜻 스쳐 지나갔던 ‘지지향’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곳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왠지 모르게 가고 싶었다.


몇 년 전 <지혜의 숲>을 방문했을 때

높은 층고와 창문 너머의 푸른 나무들, 천장까지 쌓인 책들, 카페도 있는 그곳이 너무 좋아 보였는데,

숙박까지 할 수 있다니.

이런 곳에는 누가 숙박을 할까?

어떤 글을 써내기 위해 골머리를 싸고 있는,

그래서 일주일 이상은 머무르는

어떤 작가가 아닐까?

나도 그 언젠가 뭔가를 정리하고 기록해야 할 때,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와봐야겠다, 는 막연한 다짐을 했었다.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남편에게 슬며시 던졌다.

”여보, 나 셋째 낳기 전에 일주일만 내 시간을 주면 안 될까? 지지향에 가서 쉬고 싶어. “

다행히 남편은 흔쾌히 승낙했고,

첫째를 부산 시댁에 데리고 내려갔다.


나는 과감하게 (일주일까지는 아니고) 3박 4일의 숙박을 예약했다.

1인실은 없고, 기본 2인실 기준이라 나 혼자 침대 2개를 써야 한다는 것이 왠지 어색했다.

이런 고백은 부끄럽지만, 사실 혼자 몇 박 며칠의 여행을 떠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휴가 전주까지 해야 할 일들을 번개처럼 처리하고,

뚜벅이로 지지향을 찾아갔다.




그래도 서울에 사는 나는, 파주 찾아가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우리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합정역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빨간 버스를 갈아탄다.

25분 정도 달리면, 파주 출판단지다. 5분 정도를 더 걸어가니 지지향에 도착했다.

3시에 체크인이라, 그전까지 지혜의 숲에서 책을 보기로 했다.

그때, 내 예감은 지금 고르는 첫 책이 4일간 나와 함께 하게 될 거라는 것.

뭐든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내 성격이니,

지금 고르는 책은 어떻게든 4일 안에 다 읽고 가게 될 것이었다.

서가를 쭉 둘러보는데, 회색 표지의 한 소설책이 눈에 들어왔다.


김승옥 작가의 <생명연습>이라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김승옥 작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한국 소설의 한 획을 그었다는 <무진기행>이라는 소설을 쓴 천재 작가였는데.

(심지어 20대 초반, 4개월 만에 완성한 소설이라니)


아무튼 나는 순전히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그리고 왠지 여성작가인 것 같아서(정말 무지했다)

그 책을 골라 자리에 앉았다.


묵묵히 읽어나가는데, 그의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어렵지만 흡입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한 시간 정도 열심히 읽다가, 3시가 되어 체크인을 하러 갔다.


방키를 받아 들고, 들어와 보니 정갈한 느낌의 숙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TV가 없고 대신 책이 몇 권 놓여있는,

커피나 차 같은 건 없지만 매일 제공되는 2병의 생수(참고로 커피포트도 없다. 층마다 정수기가 있다),

가구나 욕실에 세월의 흔적은 있었지만 잘 정돈되고 깨끗한 상태,

차분히 놓여있는 테이블과 의자들,

그 모든 구성들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내 방의 전경

케리어를 펼쳐놓고,

땀에 절은 옷을 갈아입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또각또각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곳에 왔을 때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물론 책을 읽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시온이에 대한 글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브런치에도 몇 개의 글을 올리긴 했지만,

미처 다 올리지 못한 내 생각과 고민과 묵상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고 창가에 앉아서 글을 쓰려니 생각보다는 집중이 잘 되었다.

한편 정도 글을 쓰고, 방에 있는 책들을 둘러봤다.


그중 내 손에 잡힌 건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라는 장편 소설.

무지한 나는 이 작가도 처음 들어보았다.

이 책도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이 소설도 나를 몰입시키는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열심히 읽다가 저녁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갔다.


첫날 저녁은 지지향에서 7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태국 음식점.

그곳에서 팟타이를 시켜 먹었다. 맛있었다.

따뜻하고 정말 맛있었던 팟타이

그런데 이제는 내 배를 숨길 수가 없어서, 식당 주인분도 나에게 한마디를 건네셨다.

”막달이신가 봐요. 배가 많이 나오셨네요. 힘드시죠?“

그 친절이 고마우면서도,

소심한 나는 왠지 부끄러웠다. (사실 막달도 아니었다. 셋째라서 많이 나온 것일뿐)

사실 지지향에 있는 내내 ‘혼자 다니는 임산부’라는 꼬리표가 괜히 나를 따라다니는 듯해서

조금 불편함도 있었다.

뭐,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혼자 다니는 임산부가 맞고, 남편 없이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 것이니까.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긴 했다.


첫날밤은 늦게까지 소설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고, 내가 집에 가기 전까지는 이 소설책을 끝내야겠다는 조급함에

자다 깨다 자다 깨다 새벽녂에도 일어나서 책을 읽었다.


그렇게 아침이 왔고, 씻었다.

이곳에는 친절하게 ‘드라이기’도 있다.

소박하면서도, 부족함이 없는 곳.

조식은 2층에 있는 문발식당에서 먹었다.

(전날 미리 신청해야 하고, 가격은 11,000원)


야채와 과일이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날은 1층에 있는 문발살롱이나 지혜의 숲, 그리고 내 방을 번갈아 다니며 계속 책을 읽었다.

지지향 1층 문발살롱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내 노트북에 기록해 두기도 했다.

점심은 간단하게 컵라면을 먹고,

저녁은 냉면을 시켜 먹었다. 배달의 민족이 되다니! 심지어 미리 요청하면 방문 앞에 놔주신다.

먼 거리라 배달비가 추가로 붙긴 하지만.. 방에서 냉면을 먹을 수 있어서 마냥 좋았다.

그렇게 둘째 날을 지내며 <삶의 한가운데>를 다 읽었다.


셋째 날, 하루 종일 걸려 <생명연습>을 다 읽었다.


총 두 권을 읽은 셈이다.

독서를 계속하며 들었던 생각은

‘독서대를 가져올 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지향에 올 때 ‘목적을 잘 정하고 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원래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왔지만, 수많은 책을 보니 눈이 돌아갔고(?) 내내 책을 읽기만 했다.

그러나 때로, 채우기보다는 비우기 위해 이곳에 방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왔다면, 조급해하지 말고 푹 쉬다가 갔으면 한다.

책을 한 페이지만 읽어도 나에게 회복이 되는 문장을 만날 수도 있기에.


마지막 생각이자 당부는, 이곳에 TV는 없지만 핸드폰이 있기에 조심하라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피곤해지면 유튜브를 했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러서 흠칫 놀라는 순간이 몇 있었다.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미디어의 유혹은 언제나 내 손안에 존재한다.

의도적으로, 의지를 들여 핸드폰을 내려두고 종이책에, 혹은 나의 노트에, 글쓰기에 더 집중해 보면 좋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3일째 되는 마지막 밤이다. 내일 아침이면 체크아웃이다.

사실 침대에 홀로 앉아 시온이를 생각하며 한바탕 울고 난 직후이다.

눈물을 쏟던 그 순간이 나는 이번 휴가의 정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 질문도 하고,

괜한 투정도 부려보고,

시온이의 모습을 그려보는 그 순간이

외롭지만 좋았다.

명확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위로가 되었다.


사실 이 기간에 글 쓴 것도 몇 개 없다.

그래도 마냥 좋다.

나만의 쉼을 허락해 준 남편에게도 참 고맙고.

좋은 작가와 책을 알게 된 것도 좋다.

다시 일상을 돌아가서 살아낼 힘을 얻게 된 것도 좋고.

지지향에 오길 잘했다.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번쯤은 꼭 와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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