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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Oct 26. 2024

12. 브라잇 동맹위원회 연경지부, 와이즈맨 - 2


 정면으로 비치는 와이즈맨의 표정은 더 이상 부드럽지도 호감도 서려 있지 않았다. 아까와 달리 매우 엄격하고 단호해졌다. 조금의 불복종이나 소란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표시 같았다. 그가 보낸 무언의 경고를 이해한 지원이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수진 역시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불안해져 얌전히 있었다. 


 와이즈맨이 지팡이로 바닥을 쾅 내리치며 매섭게 꾸짖었다.


“박지원, 그대는 비록 브라잇 동맹 출신은 아니지만 하늘이 정하여 선택되었다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가? 그대는 ‘브라잇 동맹’을 도와 그대의 나라와 주변 세상을 안전하게 지켜내야만 하는 임무를 받은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전쟁과 싸움이 전부가 아니다. 그 뒤편에서 몰래 움직이고 조정하는 미세한 악의 움직임을 탐지하여 퇴치해야만 한다. 수천 년 전 우리는 '블랙수트마키아' 전쟁에서 승리하였었다. 그러나 아직도 악의 무리는 곳곳에 숨어서 우리 동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 징표 중 하나가 이번에 ‘동악묘(東嶽廟)’가 열림으로써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한 이태백의 눈에 들어 그대가 이리로 보내졌지만 사실, 우린 그대의 힘과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대를 한번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진 않았지만 마치 호렙산에서 불꽃의 모양으로 모세에게 명령을 내린 신의 목소리처럼 엄숙하고 신령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수진에게는 그것이 로봇이나 인공지능비서가 내는 약간의 전자음 같은 것이 섞인 것처럼 묘하게 들려왔다. 그의 말이 끝나자 주변이 아주 숙연해지고 조용해졌다. 모두들 지원의 반응을 기다리며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지원이 당혹감 섞인 표정으로 진저리를 쳤다.


“저의 힘과 능력이라니요? 전 그저 책이나 읽던 선비입니다. 설령 무슨 소림사무술이나 방중의 비술 같은 걸 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고, 그렇게 여기셨다면 천만의, 만만의 말씀입니다. 전 칼로 쥐 한 마리조차 찔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계곡에서 시나 쓰고 책 읽는 것도 '능력'이라 칭하신다면 저의 유일한 것이겠지요. 악의 무리를 퇴치하라니, 무슨 농담도 그리 심하게 하십니다그려.”


 지원에 이어 수진도 그의 말마디가 끝날 때마다 고개를 심하게 끄덕이며 응원을 보냈다. 지금 그에게 무슨 일을 시키시려 저러나.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악의 무리라니.


 갑자기 그녀의 눈앞으로 지난날 겪었었던 그 생고생들이 생생하게 파노라마처럼 흘러 지나갔다. 거의 잊었다고 여겼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다시 그런 일을 하라고 한다면 그녀 역시 단연코 절대로 사양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길거리 사당패로 들어앉아 구걸하는 게 백만 번 나으리라. 그래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와이즈맨은 그들의 심정을 결코 헤아리지 못하는 듯했다. 그가 불이 켜진 지팡이 끝을 지원이 있는 쪽으로 들이밀며 그를 위아래로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리고 덤덤하게 아까보다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힘과 능력이 꼭 물리적인 힘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넌 책을 많이 읽었다니 지혜나 꾀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 아님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라든가 유연성, 재치도 얼마든지 힘이나 능력이 될 수 있다. 하물며 개 짖는 소리라도 기막히게 낼 수 있다면 그것도 타고난 능력이 아니겠느냐? 

 그래 아까, 동악묘에서 나온 것들이 어느 쪽으로 향했다고 했지요? 아까 들어온 정보원에게서 말입니다.”


 그가 환해진 빛지팡이를 높이 쳐들고 시선을 주변으로 돌려 정중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바꿔 물었다. 그러자 아까 토론에 꼈었던, 밀가루와 화이트초콜릿을 뺨에 묻히고 파란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스위니티니아 요정이 불쑥 앞으로 튀어나와 눈을 희번덕거리며 대답했다.


“화이트초코체리케이크를 구우러 화덕으로 가다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요. 분명 열하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열하라면, 지금 건륭황제가 머무는 곳 아닙니까?”


 와이즈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스님과 신부를 쳐다보며 묻자 그들은 대답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럼 박 선생을 열하로 보내야겠군요. 이미 거기에도 비상임시위원회를 소집시켰겠지요?”

 

 그러자 스님이 고개를 다시 끄덕이며 대답했다. 


“연통은 해놓았습니다. 근데 대마법사님께서 직접 가보시지 않고요?”


“저 대신 여기 박지원 선생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직 그곳에서 별다른 동향이 탐지되지 않는다면서요? 박 선생이 가셔서 위원회와 함께 조사를 벌이면 될 것 같습니다. 스님도 그와 동행하시렵니까?”


“아니오. 거기엔 저 말고 도움을 주실 분이 계십니다. 전 다시 독락사로 돌아가 이태백 와불을 지켜보겠습니다. 또 다른 징조가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와이즈맨이 살짝 목례를 하여 그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얼떨떨한 표정의 지원과 수진에게 다시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전보다 표정은 좀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고압적이 시선이 그의 눈길에서 묻어 나왔다.


“박 선생, 방금 들으셨겠지만 열하로 가주셔야겠습니다. 가시면 임시지부에서 당신을 만나러 올 겁니다. 그때 같이 활동해 주시면 됩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중한 어투의 요청이었지만 지원은 그 자리에서 몸서리를 치며 바로 난색을 표했다.  


“실례지만 어렵겠습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조선 사행단에 속해 있어 혼자 개인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열하로 가라니요? 저의 개인행동으로 인해 조국의 실리와 명예에 누가 되고 절 믿고 데려와주신 정사께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오라고 시킨다면 모를까 절대 불가합니다. 만약 죽이겠다고 협박한다면 그냥 여기서 죽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의 대답을 듣자 와이즈맨의 얼굴에 뜻 모를 이상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싶더니 뒤로 물러나 있던 독락사 스님을 곁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아주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스님은 바로 달려 나가더니 회랑 한쪽 벽면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갔다. 와이즈맨이 지원을 향해 만족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가 다 조치를 취해드리겠으니 그런 걱정은 조금도 마십시오. 그럼 마지막 절차로 영웅명부에 서명하는 게 남았습니다. 명부가 어디에 있더라?”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팡이로 신전바닥을 힘차게 쿵 내리쳤다. 동시에 주문을 중얼거렸다.


“플라잉이글드래곤, 영웅명부여 눈앞에 나타나라! 어서 제 주위에서 물러나시지요!”


 그러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눈치 하나는 빠른 수진이 멍하니 서 있는 지원의 도포자락을 뒤로 확 잡아당겼다. 


 1, 2, 3, 4, 5초, 


“쿵~”


 정확히 5초 후 천장의 어둠 속에서 백과사전처럼 생긴 두꺼운 명부가 마법사의 바로 눈앞으로 낙하해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지자 마치 책이 트림이나 하는 것처럼 사방으로 먼지를 내뱉어냈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기침을 하거나 손으로 먼지를 쫓았다. 와이즈맨이 그것에 지팡이를 갖다 댄 후 들어 올리자 책이 따라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적당한 위치에서 둥둥 뜨자 그는 그것의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종이 끝을 스치며 지나가는 척을 하자 페이지가 스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페이지는 3/2 정도 되는 곳에서 딱 멈추었다.

 

“여기 선생의 이름이 있군. 어서 이리 오셔서 서명하시오.”


 와이즈맨이 부르자 그는 순순히 다가갔다. 사실 지원의 속마음은 이미 다음과 같은 계산이 끝난 뒤였다. 


 우선 여기서 시키는 대로 다하자. 그래서 빨리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다. 그다음엔 나 몰라라 그냥 내빼는 거지 뭐. 악몽 한번 제대로 꿨다 여기면 그만이야. 


 그가 마법사 옆으로 다가서자 누군가가 그의 손에 붓을 들려주었다. 와이즈맨의 손바닥이 가리키는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거의 비어있어 휑했는데 왼쪽 페이지 꼭대기에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세 줄로 짤막하게 적혀있었다.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룬문자이니 그가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는 3번째 줄에 써진 글자 아래를 가리키는 와이즈맨의 손바닥 밑으로 한자를 흘려 서명했다. 


‘朴趾源(박지원)’


 물러나려는데 순간 와이즈맨의 큰 손바닥이 페이지에서 먼저 치워졌다. 더불어 그것에 가려졌었던, 자신의 것 옆으로 적혀있는 서명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李舜臣(이순신)’ ‘昭顯世子(소현세자)’


 본인의 눈을 의심한 지원이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명부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와이즈맨과 주변인들이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고 어디선가 “우와”하는 감탄사와 휘파람소리가 내뱉어졌다. 열 몇 장이 빠르게 넘어가더니 딱 펼쳐지며 움직임이 멈추었다. 와이즈맨의 시선이 페이지로 향하였다. 그는 엄청 놀라며 잠시 눈을 떼지 못하더니 의아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곧 그의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 


“황수진.”


 회당의 모든 이의 시선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지원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지원이 뒤에서 밀자 그녀는 엉거주춤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지원이 서명을 마친 것으로 모든 일이 다 끝났다고 여기던 차였다. 지원이 그날의 주인공이었으므로 그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다. 그저 그가 데리고 온 하인 정도로만 여긴 것이다. 그런데 영웅명부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다니. 명부가 그녀를 영웅이라고 가리키다니.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결코 예상치 못한 대사건이었다.


 충격에 빠져 주변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명부 앞에서 걸음을 멈춰 잠시 기다렸다. 와이즈맨은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녀가 흠흠 하자 그는 눈을 뜨고 복잡다단한 심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디다 서명할까요?”

 

 그의 손가락이 한 지점을 가리켰다. 붓을 잡고 한글로 서명을 마쳤다. 


‘황수진’


 그녀가 붓을 돌려주고 물러나려 할 때였다. 와이즈맨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까?”



 그는 그녀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의문이 가득 들어찬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너도 황금잎블루베리를 봤다고 하던데, 어디 출신이지?”


“대한민국 롤리마을 출신이에요.”


“대한민국? 그런 나라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자신이 과거로 와 있다는 사실을 또 까먹어버린 심한 건망증을 탓하며 그녀는 브라잇 동맹국 중 아무 나라라도 하나 갖다 대려 했다. 아님 여권이 있는 오나시아도 좋았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자가 진정 누구인지 다시금 상기가 된 것이다. ‘일룸니아 왕국’의 대마법사이고 약 200년 후 자신의 손으로 배신하여 왕국을 뒤엎고 선왕, 즉 이안의 아버지를 죽이는데 일조한 자이다. 그래서 이안의 가슴속 깊이 사무친 원망과 원한을 사기도 했다. 그런 나쁜 짓을 앞으로 할 악당에게 조금의 선의를 보이거나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졌다. 어찌했든 친구 이안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이니까. 


 그녀는 그냥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정했다. 믿을지 안 믿을지는 그가 알아서 할 몫이려니 싶었다. 그녀가 뾰로롱한 얼굴로 새침하게 말을 이었다.


“전 미래에서 왔어요. 약 200년이 조금 넘은 후겠죠. 그래서 제 고국 이름을 알지 못하시는 거예요.”


“응, 뭐라고? 미래?”


“네, 그리고 대마법사님도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일룸니아 왕국의 대마법사님이시죠. 전에 메이슨 왕이 다스리시고 있었고요. 훗날 태어날 왕자의 이름도 알고 있어요. ‘이안 일룸니아’이죠. 근데 지금은 뱀파이어예요. 그는 결코 마법사님을 좋아하지 않아요. 아니, 엄청나게 증오해요.”


 대마법사의 눈동자에 경악과 두려움이 동시에 차올랐다. 덜렁이는 겉모습과 달리 예사 소녀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말을 분석해 보았다. 그때 신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뭐라고 속삭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 손수 지원의 옆으로 데리고 갔다. 가는 도중에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플라잉이글드래곤, 벽을 없애라!”


 회당에 벽을 쳤던 대리석 덩굴들이 움직이더니 스스로 엉킴을 빠르게 풀기 시작했다. 덩굴들은 바닥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새 하늘은 노을이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컴컴한 밤이 대신 그 자리를 성큼 차지하한 후였다. 기둥 옆으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떠 있었다. 와이즈맨은 지원과 수진에게 아까 실례했다는 말과 함께 늦었으니 어서 떠나라고 전했다. 그들은 작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재빨리 그곳에서 벗어났다. 계단을 마구 뛰어 내려가는 그들에게 신부가 오히려 앞장서며 재촉하였다.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지금쯤 성당에서 절 찾을지도 몰라요. 빨리 갑시다, 빨리요. 이러다 저녁 미사가 다 끝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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