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시월드
2019년 8월
여름휴가 in 시월드
내 프랑스 남자 남편은 12년간 한국에 살면서 프랑스에 사시는 부모님을 자주 뵙지 못했다. 이번에 프랑스로 이사 왔지만, 여전히 멀리 시골에 사시는 시부모님을 자주 뵙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나와 딸아이는 차멀미가 심해서, 차로 1시간 이상 걸리는 곳을 계획하는 순간 여행에 대한 낭만보다는 힘듦에 대한 두려움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나들이 장소를 정할 때도 한 시간 이내 거리로 정한다. 이래가지고 한 세상 즐기면서 살겠나 싶다. 그래도 부모님은 뵈어야 한다. 그래서 휴가 기간만큼은 온전히 시월드에서 보내면서 평소에 못 찾아뵌 것을 만회하기로 했다.
여름휴가 첫날,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결국 오후 1시 넘어서 시댁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아이 하나 챙기는데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한국과 다르게 프랑스는 음식을 판매하는 휴게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와 간식도 든든하게 챙겨서 떠난다. 점심이야 그렇게 해결하지만, 화장실은 큰 난관이다. 아이는 늘 그렇듯 변기에 앉기 직전의 상태에서 '나 급해!'라고 외쳤다. 부랴부랴 가장 가까운 휴게소의 화장실에 들렀는데... 하..... 너무 지저분하다. 딴소리지만 대학생 때 유럽여행을 하면서 산골짜기 화장실마저 백화점 수준으로 깨끗했던 스위스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바로 옆 동네인데 왜 이렇게 다른 거야!
아직은 편리하고 깨끗한 한국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프랑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에 흠뻑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하는 날이 오겠지. 눈과 마음을 열고 긍정의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연습을 혹독히 해야만 그 열매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남편 혼자 엑셀에서 발을 떼지 않고 달리면 5시간 걸려 도착하는 시댁. 아이를 위해 1시간 간격으로 멈춰서 쉬다 보니, 아직 한참을 더 가야 하는데... 해가 지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버렸다. 시부모님께 늦는다고 말씀드리고 우리는 근처 도시에 들러서 저녁을 사 먹기로 했다.
한국은 아무 때나 밥을 사 먹을 수 있지만, 프랑스는 식당 오픈 시간이 제각각이다. 그래서 달리는 차 안에서 즉흥적으로 주변 식당을 검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구글 평점이 높은 맛집을 겨우겨우 찾아서 갔더니 예약이 다 찼다며 다음에 오란다. 우리는 주변의 다른 식당을 찾느라 의도치 않게 동네 구경을 하게 되었다. 전혀 유명하지 않은 곳이지만 프랑스 특유의 돌벽과 좁은 골목길이 만들어내는 마을의 느낌이 참 좋다. 시댁에 가는 길이지만 여행을 가는 기분이 든다.
식당이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아이는 배가 고프다고 짜증을 부리고, 날이 어두워지니 날씨마저 쌀쌀맞게 추워졌다. 아무 데나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보이는 대로 들어간 식당은 갈레트를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갈레트는 메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굽고, 그 위에 식사가 될 만한 달걀, 햄, 야채 등을 얹어서 먹는 브르타뉴 지방 전통 서민음식인데... 가격은 서민스럽지 않다. 관광지도 아니고 주말도 아닌데 비싸다. 프랑스에서의 외식은 참 비싸다.
속 재료가 모두 다른 세 가지의 갈레트를 시켜본다. 두 개는 실패하고 아이를 위해 주문한 갈레트만 성공이다. 그런데 아이는 갈레트가 맛이 없단다. 애지중지 키운 내 외동딸은 '없어서 못 먹는다는 느낌'을 언제쯤 알게 될까. 아이는 허기만 때우고 포크를 내려놓다가 물컵을 떨어뜨려 깨뜨리고 온몸에 물을 뒤집어썼다. 좁디좁은 식당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히는데 그동안 책으로 읽히고 배운 자비로운 엄마의 기술이 하나도 발휘되지 않는다. 짜증 내서 미안해.
산만한 아이의 식사 예절 덕분에 나와 남편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식사를 마쳤다. 바로 옆 테이블의 프랑스 커플은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도 참 우아하게 밥을 먹더라. 나만 빼고 우리 가족은 다 프렌치인데, 왜 우리는 안 되는 걸까. 컵을 깨뜨려서 미안하다고 여러 번 얘기하고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섰다. 매끄럽지 않은 휴가의 도입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울퉁불퉁한 기분이 되었지만,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이 또 아름다워서 마음이 누그러진다.
어두운 밤을 가르며 열심히 달려서 시월드에 도착했다.
나의 낭만 시월드는 음식의 도시로 유명한 '브르타뉴'. 바다가 가까워서 신선한 해산물도 싼 가격에 많이 사 먹을 수 있는, 한국으로 치면 여수나 남해 같은 해양관광도시다. 결혼 전 프랑스 시댁에서 상견례를 했는데, 시부모님이 테이블 가득 새우를 쌓아놓고 우리를 맞이해 주셨던 기억이 선명하다. 남편과 나는 각자 문화가 다른 지구 반대편에서 살다가 결혼했지만, 둘 다 바닷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내 프랑스 남자 남편은 한국에서 휴가 시즌만 되면 친정에 가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친정 부모님도 회부터 매운 꽃게탕까지 가리는 것 없이 맛있게 먹어주는 프랑스 사위가 참 이쁘다고 하셨다. 그런데 난 여전히 시부모님이 정성을 다해 차려주시는 다양한 치즈들을 가리지 않고 먹는 내공을 쌓지 못했다. 남편은 김치를 배우는 데 6개월이 걸렸는데, 나는 2년이 지나도 성과가 없다. 어머님 아버님, 죄송합니다.
밤늦게 도착한 나의 시월드는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시아버님의 절제된 미소도, 시어머님의 4번의 볼 뽀뽀도, 소박하고 아늑한 거실의 인테리어도 모두 그대로였다. 서랍장 위에 우리가 한국에서 보내준 아이의 액자만 추가되었을 뿐. 시월드지만 나에게도 고향처럼 느껴지는 공간에 발을 담그니, 그동안 지치고 힘든 일상 때문에 잠시 잠가두었던 젊은 시절의 푸릇한 감정과 마음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와 있을 때 나는 숨을 곳도 없이 항상 어른이어야 하지만, 남편의 부모님일지언정 나보다 어른인 시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시작되니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달까. 시댁에 가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며느리가 있을까 싶지만, 나는 그렇다.
내일은 해안가 대형마트에 가서 싱싱한 해산물을 왕창 사 와서 먹기로 했다.
(계속)
#랜선나들이, #프랑스시골, #플로에르멜, #ploërmel, #브르타뉴, #Bretagne, #프랑스거실인테리어, #고가구, #핸드메이드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