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의 앞에서
카페 안을 낮게 채우던 음악 소리에 얼마나 집중했을까? 문득 눈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담긴 감정보다 무의식 중에 발목을 놀리는 노래의 제목이 궁금해졌다. 꼬아 올린 다리에서 쭉 떨어지는 발끝은 한참 멜로디를 탔다. 그리고 이따금 작은 종이 울리는 카페 문을 향한다. 이즈음 되면 어렵지 않게 지금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너와의 대화가 지겹다. 사뭇 지겹다. 아주 미치도록.’
네 목소리의 고저를 따라 나는 적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가끔 눈을 치켜뜨기도 하고, 귓불을 만지작거리기도 한다. 안경은 적당히 고쳐 올린다. 너무 부산스러운 행동은 네 무대를 망치는 아주 고약한 요소가 되니까. 팔짱을 끼고 싶은 충동도 어렵지 않게 참을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십수 년째, 네 무대의 단골 관객인 나는 그동안 아주 교양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므로.
적당히 그립지 않을 정도로 만나는 너는 나에게 인생이라는 이름의 비극을 들려준다. 이해하기도, 공감하기도 어려운 서사들. 잠자코 듣다 숨을 고르는 너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지면 나는 그제야 짧은 비평을 내놓는다.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말과 언제나 정반대여도 너는 좋다고 한다. 주변의 다른 호사가들보다 내 비평이 더 좋다 한다. 나는 그런 너의 반응도 사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도 멋쩍은 듯 웃어 보인다. 네가 나의 그런 표정을 원하므로.
너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카페 문을 무겁게 열고 나와 가로수를 함께 걷는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기분 탓으로 넘기던 갈증이 조금씩 사라지는 듯하다. 물론 나무가 푸르기 때문은 아니다. 하늘이 맑기 때문도 아니다. 버스정류장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이토록 붉은 것을 마시는데 이리 상쾌할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도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