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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Nov 29. 2021

same boat 21

새로고침 버튼을 몇 번이나 눌렀다.


'연애 중'


처음 페이지를 열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의 여운이 아직 가시질 않았다. 몸 전체가 여전히 세차게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을 기억한다. 스마트폰이 손 안에서 점점 뜨거워져가고 있었다.


'연애 중'


세 글자를 마주한 순간 명치를 한 방 크게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그와 동시에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는 딱 그만큼이구나 느꼈다. 애매하게 불어대는 잔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같던 마음이 일순간 대나무처럼 꼿꼿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늦었어."

"뭐가?"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오늘 날씨 좋다.] 문자를 받자마자 나는 곧장 공과대학 앞 캠퍼스 한가운데 넓게 펼쳐져 있는 잔디밭으로 달려갔다. 시는 그곳에 가방 하나를 아무렇게나 던져둔 채 앉아있었다. 나는 그 곁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는 다짜고짜 내뱉었다. 


"다 늦었어."

"슬퍼?"

"잘 모르겠어."


정말 나는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혹은 어떤 기분으로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허무했다.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깨닫기도 전에 이미 거절을 당한 셈이었다. 왜 좀 더 빨리 깨닫지 못했지, 나는 또 내 마음을 탓하고 있었다.


"일찍 알았다면 말해 볼 용기는 있었을까?"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아니 그냥 나한테 묻는 건데 어쩌다 보니 옆에 네가 있는 거야."


아직도 떨리는 몸이 진정되질 않아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나의 말을 듣던 시는 입을 삐죽거리곤 던져뒀던 가방을 끌어와 베개 삼아 잔디밭에 누웠다. "아마 내가 아는 리에게 그런 용기는 없었을 걸. 괜히 짝사랑 전문가가 아니지." 비꼬는 듯한 뉘앙스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은 아직도 먹먹했지만 미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지. 살짝 패배감이 밀려드는 것도 같다.


"야."

"왜?"

"나는 왜 이렇게 매번 늦게 깨달을까?"

"그것도 용기가 없어서 그렇지 뭐."

"용기?"

"아니면 자신감이라든지."

"……."

"리는 늘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해도 될까?' 이런 질문이나 하고 앉아있잖아. 누굴 좋아하고 말고에 권리가 어딨어. 그냥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고선 왔던 길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의 말 중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감정을 당최 정리할 수가 없다. 머리가 복잡했다. 뭐 하나 종잡을 거리 하나 없이 머릿속을 무언가가 꽉 메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시를 만난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아르바이트에 연구실 프로젝트에 이리저리 치여 뒷전이 된 과제들을 뒤늦게 처리하느라 카페에 죽치고 있었다. 눈은 모니터를 향해 고정하면서 커피가 있어야 할 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공간이 내 생각과 달리 뒤틀려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시가 앉아있었다. 시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나를 향해 따뜻한 머그컵 하나를 내밀었다. 부드러운 우유 크림이 얹어진 화이트초코였다.


"누구세요?"

"어제 봤어요. 그렇죠?"

"네?"

"우리 요즘 매일 봤잖아요."


그러고는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시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시를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 하루 일과는 내 방, 강의실, 연구실, 마트를 거쳐 다시 내 방으로 돌아오면 끝난다. 그 사이 어디서 보았다는 것일까? 가족도 아니고, 동기도 아니고, 같은 연구실 소속도 아닌데?


"아, 마트 손님이세요?"

"맞아요."


시는 또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나를 향해 다시 머그컵을 들이밀었다. 내 커피잔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어색한 인사를 하며 머그컵을 조심스레 잡았다. 뜨거운 음료를 잘 마시지 못해 생긴 버릇이었다. 손으로 잡아 많이 뜨겁지 않으면 입가에 대고, 올라오는 열기를 코로 다시 한번 느껴본다. 안전하다 싶으면 그제야 아주 적게 한 모금 마셔본다. 그날 시가 들이민 건 아주 적당한 온도의 화이트초코였다. 단숨에 지친 몸을 달래줄 정도로 적당한 화이트초코.


"맛있죠?"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됐어요. 결제는 당신 카드로 했거든요."


그리고 웃어 보이는 시가 이상하게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이 시와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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