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리의 등을 한참 도닥였다. 그리고 모두 지워내라고 했다.
1.
처음으로 타인의 작품을 가지고 교열 작업을 진행했다. 이제까지 해 본 제대로 된 교열 작업이라고는 내 번역 논문이 전부였다. 동기의 번역 논문도 교열을 봐주기는 하였지만 그건 작업을 했다기보다는 동기를 가르치기(..) 위한 일종의 공부에 더 가까웠으니 배제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번이 첫 정식 교열 작업이 된다. 내 글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글을 보는 것은 사실 내 성격에 조금 괴로운 일이다. 나는 타인의 글을 볼 때마다 전부 내 식대로 바꿔서 다시 문장을 쓰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어제 본 원고가 그랬다. 나는 쉼표를 많이 쓰지 않는 타입이다. 한 문장에 쉼표 하나도 가끔은 벅찰 때가 있다. 그런데 어제 본 책의 문장은 쉼표 투성이어서 내내 고민을 많이 했다. 쉼표 하나를 빼는 것도 아직 나에겐 힘든 일이구나 생각을 했다.
2.
그렇게 교열 작업을 하던 중에 지진이 발생했다. 활자에 온 신경을 쏟고자 노력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천장에서 쿵, 쿵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 건물이 마침 몇 달 전부터 공사를 진행하고 있어 처음에는 그것이 공사 소리인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얼마 안가 모니터가 흔들리고 옆 책장 위 화분들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재난문자 알림음에 패닉 상태로 빠지는 듯했다. 그러나 지진을 알리는 다급한 상급자의 외침에 바로 정신을 차리고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건물 밖으로 대피했다. 손은 빨간펜을 쥐고 발은 털실내화를 신은 채였다. 입구에서 한참 떨어져 건물 안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책상 위 원고를 들고 나오지 못한 것만 걱정됐다. 그것이 지진은 아니었다면 좋았겠지만, 품고 있던 두통이 정신없는 사이 잠깐 사라져 마음이 편해졌다.
3.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친구와 오랜만에 긴 통화를 했다. 유쾌하지 않은 내용인데도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안심이 됐다. 종종 두통이 심할 때마다 상담을 해주는 지인과도 통화를 했다. 통화를 하면서 한참을 울다가 또 웃다가 그러다가 또 울다가를 반복했다. 쏟아내라며 다독이는 목소리가 따뜻해서 고마웠다. 스스로가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인간인지 새삼 깨닫는다. 내 머릿속 생각과 두통이 너무나 괴롭기에 타인에게만큼은 이 모든 마음을 꽁꽁 가리고 그저 좋은 단어들만 들려주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결국 무장해제되고 만다. 감사한 일이다.
4.
많이 섧고 또 많이 울적한 하루였다. 사실 교열을 보는 내내 집중이 되지 않아 혼났다. 원고 위로 눈물이 떨어지려는 것을 막느라 혼났다. 그러다 화장실에 틀어박혀 한참을 못 나왔다. 나는 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평소에는 곱씹으면 바로 상대가 원하는 답이 떠올랐는데 이번에는 이 모든 상황의 알고리즘만 명확하게 떠올랐다. 내 안에 쌓인 문제들의 시작점은 내가 아닌데, 상대방은 나라고 한다. 친구에게도 몇 번을 되물었다.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지?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이야? 그러는 사이 요즘 안고 있는 모든 고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상황은 그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 결국 나로 귀결하게 만든다. 며칠 밤을 새우니 사실 이제 무엇이 진심인지도 잘 모르겠다. 차라리 허상이었으면 좋겠는데 허상이 아니어서 슬프다.
5.
서른이라는 나이를 이런 감정으로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다. 소파에 가만 앉아있던 시가 그렇게 말했다. 스물에 그러하였고, 스물여섯에 그러하였듯이 모두 지우면 사실 끝날 일이다. 모두 지우고 나쁜 생각을 하지 않을 곳으로 안전하게 숨으면 된다. 나에겐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다.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렵지 않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모두를 숨길 수 없다면 내가 숨으면 된다. 늘 그랬다. 그게 가장 편한 자기 위로였다. 그렇게 전부 잊으면 편하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스물 때도, 스물여섯 때도, 서른 때도 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게 또 절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