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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Jan 19. 2020

자신감은 지갑에서 나온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고마워서 그랬어

-여행하면서 소매치기 당한적 없어요?

-소매치기를 당한 적은 없지만, 도움을 받은 적은 많아요.


나는 겁이 많다. 여행이 조금 느려지더라도 중요한 물건은 몸 안에 꽁꽁 숨겨놓고 다니는 편이라 소매치기를 당한 적은 아직까진 없다. 반면에 여행 중에 참 고마운 사람이 많았다.


오토바이를 태워준 애드레인(오른쪽)과  애드레인을 불러준 파란티(왼쪽) 그리고 기름값 내주신 형님(가운데)


한 번은 내려야 할 정류장이 아닌 엉뚱한 곳에 잘못 내려서 알 수 없는 곳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적이 있었다. 해는 점점 저물어가고 어디인지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을 때 나에게 한 친구가 다가와서 말했다.


-꼬레?

-응 꼬레!


터키 말이라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맛있어요. 밖에 모르고 떠난 여행이라 긴 말은 못 했지만 그 친구의 말 중 알아들은 말이 있었다.


-까르다쉬!


언젠가 아버지가 터키는 돌궐 족의 후예이기도 하고 전쟁 때 우리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우리를 형제라고 여긴다. 그래서 터키에 있는 친구는 아버지에게 '까르다쉬(형제)' 라고 부르곤 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 친구에게 말했다.


-까르다쉬! 까르다쉬!


그 친구는 내게 터키 말로 길게 설명을 했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핸드폰을 꺼내서 어디론가 전화하더니 내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시간이 지나 다른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고, 그 친구는 나를 태워서 원래 가려고 했던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다. 가는 도중 기름이 떨어져서 주유소를 갔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있던 친구가 돈이 없었다. 나 또한 현금이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주유소 사장님이 오토바이를 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내게 또 환하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까르다쉬!


그렇게 나는 까르다쉬 매직으로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호스텔에 도착해서도 까르다쉬 매직은 이어졌다. 방 값도 대폭 할인받게 된 것이다. 이는 터키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여행을 다닐 때면 현지인의 친절로 인해 여행이 풍성해지고 감동이 가득해질 때가 많았다. 그들은 때론 길 위에서, 때론 공항에서, 때론 숙소에서, 여기저기서 나타나 나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라졌다. 연락처도 모르고, 가난하게 여행했던 나였기에 그들의 친절에 직접적으로 갚을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하면서 여행한 국가의 한국 대사관에 찾아갔다. 그곳엔 한국 비자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친구들에게 다가가서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고, 한국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말했다.

외국인투어와 기독교투어


자신감은 지갑에서 나온다.

한국에 도착해서 연락이 된 친구들하고 같이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었다.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돈을 받지 않고 아니, 오히려 밥이랑 선물 사주느라 돈을 써가며 투어를 진행했다. 굉장히 재밌었다. 친절함에 보답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가이드 일 자체가 매우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외국인 뿐만 아니라 내국인한테도 투어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관련된 투어를 만들어서 한 번 진행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처음엔 친구들을 시작으로 종교투어를 진행했다. 굉장히 신기했던 것은 참여하는 사람들 중 종교인들의 비율보다 비종교인들의 비율이 더 높았다는 사실이다. 돈을 받지 않고 하는 무료투어다보니 아르바이트를 병행해가며 투어에 필요한 비용들을 충당해야 했다. 내가 투어를 했던 이유는 한 가지였다. 가이딩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드러났다. 예약금 없는 무료투어라는 특성상 노쇼가 정말 많이 있었고, 가시적인 성과나 동기부여가 없으니 스스로도 흥미를 잃어갔다. 또한 그로 인해 전문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으니, 취업은 언제 할 거냐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듣곤 했다. 사실 워낙 내 멋대로 살아온 인생이라 그런 이야기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돈이 없으니 자꾸만 위축됐다. 나는 자신감이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감은 두꺼운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여행사에 취직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스타트업 형태의 회사였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누군가의 밑에서 월급을 받고 일한다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느꼈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회사 운영이 잘 안됐고, 회사 사정이 점점 안 좋아지면서 월급이 계속 밀리곤 했다. 회사에서도 일부러 안주는 것이 아니었기에 월급을 제 때 달라고 말하는 것도 왠지 눈치가 보였다. 돈 없이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처음엔 괜찮았는데 이 상황이 계속되니 제일 친한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하루는 교통비가 연체되어 버스를 못 타고 투어에 늦을 뻔한 적도 있었는데 한 여름에 땀범벅이 되어서 손님들을 맞이 했다. 간디 자서전이나, 다른 위인전들을 보며 돈이 없어도 자신감 있게 살 수 있다고 평소 생각해왔는데, 그 사람들이 왜 위인인지를 느끼는 하루하루였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 자신감은 지갑에서 나왔다.


경복궁 흥례문  ⓒ이서준



무항산 무항심

맹자는 일찍이 무항산 무항심(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라는 말을 남겼다.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인데, 광화문을 지나서 입장 티켓을 구매하면 통과할 수 있는 문이 나온다. 이 문의 이름은 흥례문. 예를 흥하게 한다는 말은 맹자의 무항산 무항심의 가치와 일맥상통한다.


"백성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2월 12일 중


세종대왕 때의 백성들은 기근에 크게 시달렸다.  먹듯이 굶어서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 . . 지와 같이 숭고한 가치들을 이야기해봤자 들을  없다. 세종대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결국 많은 업적들을 남겨 우리들에게 지금까지도 알려지고 있다. 성군이 되는  번째 덕목은 백성들의 먹을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얘기를 사람들한테  때마다 힘이 빠졌다. 월급도 제대로  받는 상황에 흥례문은 무슨 흥례문.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계속 밀리는 월급 사이에서 계속해서 흔들리는 내가 미웠고, 월급이 밀릴 때마다 생활하는데 브레이크가 걸리는 상황에서 밀린 월급을   있겠냐고 눈치 보며 말하는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과 후를 비교해보면 확실히 손님들을 조금  고정적으로 만날  있다는 점이 좋았지만, 아르바이트를  때보다 임금이 적었다. 점입가경으로 회사 사정이   좋아지면서 월급이 대폭 깎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과연   일을 계속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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