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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 in Wonderland Nov 11. 2017

[발번역] 호시 신이치 '봇코짱'

 만약 우리가 사는 세상, 즉 물리적인 세계와 그 안에 사는 생물들의 여러가지 사정, 욕망과 절망, 성찰과 포기를 한 껍질 안에 담은 거대한 수박이 있다고 한다면, 일본의 소설가 호시 신이치는 단단한 대롱으로 그 수박을 여러 각도에서 찔러본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롱은 얼핏 보면 과학의 무늬를 띠고 있어서 호시 신이치는 통칭 SF 작가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만, 사실 SF는 호시 신이치가 택한 작법 가운데 하나로 보고 넘어가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대신 커다란 도끼도, 과도도 아닌 '대롱'이라는 점이 호시 신이치의 특이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됐든 그의 작품들은 짧기로 유명하니까요. 사실 그래서 접근하기 쉬운 것은, 저같은 (쉽게 질려버리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겠죠.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지만, 역시나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통 모르는 그의 작품 하나를 '발번역'했습니다. 언젠가 김영하 작가가 그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에서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어 준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번역본을 낭독으로 듣는 것과, 원문을 능력껏(즉, 말하자면 '꾸역꾸역') 번역해 이해하는 것은 좀 다른 느낌입니다. 호시 신이치를 제게 알려준 작가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역시 호시 신이치가 써내려간 그대로를 부족한 능력이나마 해독하려 하는 편이 훨씬 재미가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아주 짧습니다. 일본의 문고판으로도 여섯 페이지밖에 되지 않습니다. 실로 감사한 노릇입니다. 번역의 오류나 어색한 점은 모두 발번역자의 책임입니다만, 최대한 열심히 해 봤습니다. 



[봇코짱]


그 로봇은 실로 잘 만들어졌다. 여성을 본뜬 로봇이었다.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얼마든지 미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여러가지 미인의 요소를 모조리 집어넣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완전한 미인으로 만들어졌다. 게다가 살짝 쌀쌀맞았다. 그러나 쌀쌀맞다는 것 역시 미인의 조건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로봇을 만든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는 로봇을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런 걸 만들 돈으로 더 능률이 좋은 기계를 만들 수 있었고, 그 전에 이미 일자리를 얻고 싶어하는 인간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기계는 단순히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졌다. 만든 것은 바bar의 마스터였다. 바의 마스터라고는 해도 술을 마시는 사람은 아니었다. 돈은 주정뱅이들이 이미 벌어 주는 것이었고, 어차피 시간도 있었고 해서 로봇을 만든 것이다. 완전한 취미 생활이었다. 


오히려 취미였기 때문에 정교한 미인 로봇이 만들어졌다. 실제 사람과 똑같은 느낌이어서 구별하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겉보기에는 진짜 사람보다 더 사람 같았다. 


그러나, 머리는 텅 빈 것에 가까왔다. 마스터도 거기까지는 손을 댈 수 없었다. 간단한 질문에만 대답할 수 있었고, 동작도 술을 마시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마스터는 그 정도 완성된 단계에서 로봇을 바에 두었다. 마스터의 바에는 테이블 석도 있었지만, 로봇을 카운터 한 가운데 설치했다. 결점을 보이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여자아이가 있으니 손님들은 일단 말을 걸어보았다. 로봇은 이름과 나이를 물어보았을 때 제대로 대답했지만, 그 다음은 답을 듣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로봇이라는 걸 깨닫지는 못했다. 


"이름은?"

"봇코짱."

"몇 살이야?"

"아직 어린 걸."

"몇 살인데?"

"아직 어리다고요."

"그러니까 몇 살이냐고..."

"어리다니까요."


이 술집의 손님들은 품위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누구도 그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멋진 옷이네."

"멋진 옷이죠."

"뭘 좋아해?"

"뭘 좋아할까요?"

"짐 퓌즈(술의 일종) 마실래?"

"짐 퓌즈 마실래요."


술은 얼마든지 마셨다. 게다가 취하지 않았다. 


미인인데다 어리기도 하고, 게다가 새침하기도 하고, 대답은 쌀쌀맞다. 소문이 퍼지자 손님들이 가게에 몰려들었다. 봇코짱을 상대로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시고, 봇코짱에게도 술을 샀다. 


"손님들 중에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 없어?"

"누가 좋을까요?"

"날 좋아하는 건 어때?"

"당신을 좋아할래요."

"그럼 영화라도 보러 갈래?"

"영화라도 보러 갈까요?"

"언제 갈까?"


대답할 수 없을 때에는 신호가 울려서 마스터가 달려 온다. 


"손님, 그렇게 희롱하시면 안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상황을 깨닫고 웃으며 이야기를 멈추었다. 


마스터는 때때로 몸을 웅크려 발 밑의 플라스틱 대롱에서 술을 회수해 그걸 다시 손님에게 제공했다. 

그래도 손님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젊은 데다가 제대로 된 여자아이다. 주절주절 알랑거리지도 않고, 술을 마셔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점점 인기가 올라 가게에 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가운데 청년 하나가 있었다. 봇코짱에게 열을 올려 여러 번 가게에 왔지만 봇코짱이 언제나 '조금만 더' 하며 애를 태우는 터에 짝사랑은 커져만 갔다. 술값은 늘어만 갔고, 결국 술값을 내기가 어려워져 점점 집에서 돈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혼쭐이 났다. 


"두 번 다시 그 집에 가지 마라. 이 돈으로 다 갚고 와. 이게 마지막이다."


그는 밀린 술값을 내기 위해 바에 갔다.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도 술을 마시고, 작별의 표시로 봇코짱에게도 계속 술을 먹였다. 


"이제 여기 못 오게 됐어."

"이제 여기 못 오나요."

"슬픈 건가."

"슬프네요."

"사실은 슬프지 않지?"

"사실은 슬프지 않네요."

"너처럼 차가운 여자는 없어."

"나처럼 차가운 여자는 없어요."

"죽여버린다."

"죽여주세요."


그는 주머니에서 약봉지를 꺼내 술잔에 넣고 봇코짱 앞으로 내밀었다. 


"마실래?"

"마실게요."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봇코짱은 술잔을 비웠다. 


그는 "멋대로 죽는다면야." 하면서, "멋대로 죽을게요."하는 말을 뒤로 하고 마스터에게 술값을 전부 지불하고 가게를 떠났다. 밤은 깊어져만 갔다. 


마스터는 청년이 문을 나서자 남아 있는 손님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제가 사겠습니다. 모두 실컷 드세요."


술을 사겠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플라스틱 대롱에서 다시 꺼낸 술이다. 가버린 청년이 다시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와아-"

"좋아, 아주 좋아!"


남아 있는 손님들도, 가게에서 일하던 점원들도 함께 건배를 했다. 마스터도 카운터 안에 서서 술잔을 비웠다.  


그날 밤, 바의 전등은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는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어느 누구도 돌아가지 않았는데도, 사람 목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라디오도 '안녕히 주무세요'라며, 음악을 멈추었다. 봇코짱은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중얼거리며 '다음에는 누가 말을 걸어 줄까'하는 새침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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