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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 in Wonderland Apr 03. 2019

[발번역] 아사히 연재 '말하다..인생은 선물'

재일 한국인 최초 도쿄대 교수 강상중 編

 아사히 신문이 지난 3주 동안 재일 한국인 정치학자 강상중 교수의 인생 이야기를 연재..총 15편으로 3월 11일부터 29일까지 문화면 한쪽에 실렸다. 기획 코너 제목은 '말하다..인생은 선물(語る~人生は贈りもの). 연재 첫날인 3월 11일은 마침 동일본대지진 8주기가 되는 날이어서 평소보다 신문을 꼼꼼히 보았는데, 그때 이 코너를 발견. 한 편의 양이 그리 길지 않아서 무심코 에버노트에 번역을 해 놓고, 번역해 놓은 게 아까워서 다음 날부터 매일 조금씩 번역. 15편을 모아 놓으니 길이가 꽤 된다.

 부끄럽게도 강 교수의 책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어서 번역의 계기도 단순하다. 재일 한국인, 정치학자로 유명한 강 교수 인생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것. 매일 매일 통시적으로 흘러가는 강 교수의 이야기는 담담했지만, 그가 7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어떤 변곡점들이 있었고, 그 지점들이 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들의 죽음 사이에서, 번민하고 깨달으며 지금에 이르게 된 마음의 여정 같은 것 말이다. 

 말은 줄이고,  [발번역]을 여기 올려둔다. 오역과 오해, 잘못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 있다면, 그건 순전히 발번역자의 몫이다. 




[1]


 동일본대지진으로부터 8년이 되었군요. 그때부터 제 생각도 바뀌었습니다. 

 3.11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후쿠시마현의 피해지역 마을에 TV방송의 리포터로 취재를 하러 갔었습니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의 영향으로 집은 있지만 인기척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제비꽃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피어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전후시대의 막이 내렸다고 느꼈습니다. 한결같이 풍요로움을, 기술의 진보를 추구해 왔지만, 더이상 그런 시대는 아니다, 사회도 나도 바뀌지 않으면 안왼다고 말이죠. 그렇게 통감하고 나니 눈물이 흐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가노현 가루이자와로 이주해 살기로 결심한 건 그때로부터 조금 더 지났을 땝니다. 수도권의 베드타운에 살고 있었습니다만, 고원에 숲이 펼쳐지는 풍경에 왠지 마음이 끌렸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구마모토의 자연과 겹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강 교수는 아내와 함께 밭을 일구고 경작지 구석에 채소밭을 일궜다. 오이와 가지, 방울토마토 등 계절 채소를 키우는데, 봄에는 뒷뜰의 두릅을 먹는다. 6년 쯤 전부터 그런 나날을 살고 있다.>

 고원의 한가운데 몸을 두고 있으면 바람 소리와 새 울음소리가 정말로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아이도 자연을 좋아했었죠.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도 훅 들려옵니다. "어떤 일도, 어떻게든 된단다."
 

 어머니는 아직 10대일 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와서 줄곧 지내셨습니다. 돌아가신 지 14년, 어머니의 모습이 가물가물해지는 만큼, 남겨진 말들은 지금까지 읽은 만 권의 책보다 마음에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를 살아가는 버팀목입니다. 


[2]


  지금 저는 고향 구마모토에서 현립극장의 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몇 번을 오가고 있자니 고등학교까지 보낸 곳이라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이 말을 걸기도 합니다. '테츠오 군' '텟짱'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옛날 생각에 마음에 등불이 켜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제 일본 이름이 '나가노 테츠오'였거든요. 스무 살이 지났을 때 생각하는 바가 있어 이 이름은 쓰지 않게 되었지만, 부르기 좋은 이름입니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테츠오'라고 부르셨죠. 


 어린 시절을 구마모토의 재일 한국인 마을에서 보냈습니다. 모두 찢어지게 가난했고, 함께 울고 웃고 싸울 정도로 사람과 사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습니다. (웃음) 그런 인간상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마을의 공기가 제 마음의 원형질을 만든 것 같습니다. 


<한반도 출신인 강 교수의 부모는 전쟁중 첫 아이를 잃었지만 그런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고생을 겪고, 구마모토에 살게 되었다. 전후에는 폐품수집으로 생활을 이어갔다>  


 차별도 있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부모님이 사회에 비판적인 말을 입에 올리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들인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이상합니다만, 두 분 모두 노력가였습니다. 일고 쓰기가 능숙하지 못했던 아버지가 열심히 공부해서 운전면허증을 땄을 때 "사람은 노력이 제일 중요해"라고 어머니는 기뻐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역시 읽고 쓰기가 불가능했던 어머니도 당신 나름의 기호를 만들어 가게의 장부를 쓰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고도성장기를 향해 나아갔고, 집안의 사업도 바빠져서 6살 쯤 우리 가족은 재일 한국인 마을을 떠나 다른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새 집에는 형광등이 있었는데, 그 눈부심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그 시절, 그러니까 6.25 직후에, 혼란이 계속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일본 사회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기로 결심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새 집 주변은 잡목림이 펼쳐지는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친구들과 뛰어 놀았습니다. 걱정할 일 하나 없는 시절을 지내면서 저는 저와 가족이 '보통'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이 조금씩 신경쓰이기 시작했습니다. 


[3]


 꽤나 즐거웠었는지, 소학교의 교가는 지금도 부를 수 있습니다. 리틀야구에 열중하기도 했습니다. 공부도 어쩐 일인지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잘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텟짱'이라고 부르며 좋아해 줘서 그 때는 조금 눈에 띄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산 속의 골목대장도 고학년이 되면서 조금 비뚤어지기 시작합니다. 전학을 온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된 겁니다. 첫사랑이죠. 모두 구마모토 사투리를 하는 가운데 깔끔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그 아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웃음) 조금 사이가 좋아져서 우리 집에 놀러오고 싶다고 말해 주었죠.  


 참으로 기뻤지만, 이런저런 말로 얼버무리는 와중에 그녀는 다시 전학을 가버렸습니다. 왜 그녀를 집으로 부르지 않았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마음 속 어딘가에 허세가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우리 집의 생활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그 즈음에는 부모님의 일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특별히 숨길 것도 없었지만, 나와 가족의 생활이 사회 일반적인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나름대로는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바깥 세계를 알아갈수록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은 의식이 마음 속에 싹텄습니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나의 정체성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죠.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중학교 2학년 때,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TV로 보고 깜짝 놀랐죠. 도쿄는 세계 속의 도시구나, 하고요. 


<그 다음해, 강 교수는 어떻게든 도쿄에 가보고 싶어져서 친구들과 함께 가출을 결행한다. 집에서 현금을 들고 나와 기차에 타고, 친구의 형이 일하는 도쿄 도내의 신문배달점에 부탁해 이르바이트를 하기로. 그러나 가출 사실이 바로 부모에게 들통나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물론 엄청나게 화를 냈습니다. 그래도 돌아온 뒤에는 터는 구마모토의 모든 것들이 작게 보여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4]


 중학교 땐 야구부의 중심 선수였습니다. 발이 빠르고 유격수를 봐서, 나중에 아마추어 선수가 되면 어떨까 하는 꿈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는 세이세이코로 진학했습니다. 1958년 오 사다하루(왕정치) 선수가 있던 와세다실업 고등학교를 준준결승에서 격파하고 고교선발야구대회에서 우승한 전통에 이끌렸습니다. 그러나 2학년때 야구부를 그만뒀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정면으로 눈을 뜨기 시작해 내향적인 성격이 되었던 것은 그 시절부터였습니다. 


 이런저런 의문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왜 '재일'이라는 것에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부모님과 같은 재일 한국인 1세대들이 숙명처럼 짊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6.25 전쟁이 일어나 남북이 분단되어 버린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런 의문에 대해서는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도 점점 마음이 떠나 출석일수 부족으로 3학년 진급이 위험할 정도였습니다.


 감사했던 것은, 부모님이 그저 지켜봐 주셨다는 겁니다. 당시 재일 한국인은 기업 취직도 힘들었기 때문에, 공부를 해서 고학력자가 되어도 의미가 없다는 서글픈 생각을 실제로는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외톨이였던 강 교수를 위로했던 것은 독서였다. 강 교수의 부모는 폐품수집으로 수집한 헌 책 가운데 좋아하는 책을 골라 읽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종합잡지나 역사서, 문학작품 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그 가운데서도 구마모토와 인연이 있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가까이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책을 가장 많이 읽었죠. 요즘 말로 하면 '히키코모리'였습니다만 돌이켜 보면 히키코모리 자체는 그렇게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붙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부모님이 의외로 간섭하지 않은 것이 감사했습니다. 저 스스로도 썩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아플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표현하기가 좀 어렵습니다만, 마음의 문을 닫아 건 그 지점에서 다시 나갈 수 있는 도움의 손길을 슬쩍 내미는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자로 사회를 배운 저는, 역시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가출을 해서라도 보고 싶었던 도쿄에 다시 가자는 결심을 하게 된 겁니다. 


[5]


 대학은 재수를 해서 와세다 정치경제학부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도쿄는 고도성장기의 한복판이었죠. 거대한 배전반 같은,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느꼈습니다. 저 같은 시골뜨기가 과연 잘 해나갈 수 있을까, 불안감을 느낄만큼 모든 거리가 활기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오사카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축제와도 같은 공기가 일본 열도를 덮었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밝아지고, 사람들은 소시민으로서의 만족스러운 생활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 사건이 일어나 '정치의 계절'이 종언을 고합니다. 그렇게 왕성했던 학생운동이 점점 빛을 잃어갔습니다. 그때 저는 뭘 하고 있었냐면, 대학 강의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다지 출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클 활동에 열정을 쏟아부었던 것도 아닙니다.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불확실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작은 삼촌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왔습니다. 삼촌과의 만남이 뒷날 큰 변화로 이어집니다. 


<강 교수의 삼촌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헌병이 됐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인 아내와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남겨두고 고향으로 귀환, 일본에서의 과거를 숨기고 살다가 6.25가 휴전으로 끝난 뒤에는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한국에서 기반을 쌓아올린 삼촌은 일본에 있는 처자를 찾으러 온 겁니다. 저도 도와드렸습니다만, 결국 그들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어둠을 끌어 안은 인생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죠.


 1972년 여름에, 삼촌이 한국에 와 보지 않겠냐고 제안합니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출발해 부산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서울로 갔습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갖고 있던 잡지에 김일성과 관련된 기사가 있던 것이 입국심사에서 발견돼, 엄한 심문을 받게 됩니다. '조국'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쓰게 된 것입니다. 


[6]


 처음 찾은 한국에서는 서울의 삼촌 집에서 한 달 정도 지내면서 이곳저곳 안내를 받았습니다. 친할머니와도 만났고, 어머니의 고향에서는 친척의 친척들까지 모여 환영해 주셨습니다. 수십 명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던 것도 좋은 추억입니다.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삼촌은 파이팅이 넘치고, 운전수가 딸린 벤츠를 타고 다녔습니다. 길가의 교차점에 차가 멈추면 거리의 아이들이 와 하고 몰려들어 앞유리를 닦고,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1972년의 한국은 아직 가난해서 도심에도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몰려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왠지 마음이 아파서 처음에는 빨리 일본에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제가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요. 그들은 제가 어릴 적 살았던 구마모토의 재일 코리안 부락의 사람들과 닮아 있었습니다. 비록 찢어지게 가난하고, 술에 쩔어 있기도 하고,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고, 복잡한 상황도 종종 일어났지만, 어딘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희노애락에 넘치는 한국인들과 접촉하고 있자니,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도쿄에 나와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강 교수는 이런 질문을 받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렇게 잘난 척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느냐.'>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날, 노을에 덮인 서울의 거리를 바라보면서 무언가로부터 해방되어가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문득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나는 나다. 틀에 박힌 채로 살 건 아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마음 속 여기저기를 덮고 있던 부스럼 딱지가 뽁뽁 하고 벗겨져 떨어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나로부터 변화하고 싶다,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가노 테츠오로서가 아니라, 강상중으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7]


 사람과 정면으로부터 교류하지 않으면 현실 세계를 알 수 없다. 이것이 한국으로의 여행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교훈이었습니다. 고교 시절, 재일 코리안으로서 살아가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저는, 제 안에 구축된 성 안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곳에 작은 구멍을 뚫어 그제서야 바깥을 보기 시작했고, 여행은 그런 자세를 새롭게 해주었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강 교수는 한국문화연구회(한문연)에 들어간다. 재일교포 2세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였다. '우리들은 소수자로 학생운동을 주도할 수는 없지만 설령 후위라고 해도 영광스러운 후위가 되자'는 리더의 말에 마음이 이끌렸다.>


 한문연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기초로 혁명을 목표로 하는 조직은 아니었습니다.  독재국가였던 한국의 민주화를, 말하자면 후위에서 지원하고자 하는 뜻을 모은 단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별볼 일 없는 활동이었죠.  (웃음) 재일이라는 핸디캡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고, 재일 한국인 가정을 방문해 사정 청취를 했습니다. 취업차별이나 학교에서의 괴롭힘 등 가까운 문제부터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생각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얻어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내성적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외향적으로 변해갔습니다. 


 1973년에는 도쿄에서 김대중 씨가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부조리한 일을 '조국'이 일으킨 근저에는 결국 한반도의 남북 분단과 독재정치가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현실의 무거움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말이죠, 당시 일본은 한창 번영을 구가하는 중이었죠. 한국에서 많은 민주화운동가가 탄압당한 민청학련사건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을 도쿄 긴자의 스키야바시에서 실행에 옮겼을 때는 긴자 밤거리가 불야성으로 보였습니다. 와세다 대학의 캠퍼스에서도 장발머리의 학생들이 단발 7대 3 가르마로 바꾸고 취직활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문연의 동료들은 좀처럼 생각대로 취직을 하지 못한 채 , 황량한 사회로 몸을 던지게 됩니다. 천천히 생각해 볼 시간을 갖고 싶었던 저는 대학원으로 진학했습니다. 


[8]


 대학원에서의 연구 테마는 막스 베버의 사상을 뒤쫓는 것이었습니다.  베버는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활약한 사회과학자입니다. 베버에는 굉장히 몰두했었죠. 다만, 박사과정까지 진학을 했지만 좀처럼 생각한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보다 못한 지도교수가 이런 제안을 해 주셨습니다. "자네는 저널리스틱한 감성을 갖고 있으니 한 번 해외에 나가보면 어떨까?"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였던 서독 대학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197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베버가 독일인이었것에도 마음이 움직였다. 베버의 원전 해독에 몰두한 날들은 나중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2년 정도 유학생활을 했습니다만, 한국이나 타이완, 이란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임마누엘과의 만남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그는 의대생이면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통하는 게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집으로 저를 초대해 주었습니다. 그리스에서 이민을 온 가족으로, 뮌헨의 슬럼 같은 뒷골목에 집이 있었고 화장실은 공용으로 썼습니다. 임마누엘의 부모와 악수를 하고 헉 하고 놀랐습니다. 마디마디 튀어나온 그 손의 느낌이 폐품수집업으로 생활을 이어가던 저의 아버지와 똑같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두 분 모두 맥주 공장에서 병 세척이나 상자 야적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였습니다. 독일어도 부자연스러워서 현지 사회에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먼 유럽에도 '주변인으로서의 노동자'가 있다. 재일 코리안들만이 소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피부로 느끼고 나니 뭔가 어깨의 짐이 덜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부연하자면, 이런 비슷한 구조는 우리 외에도 세계사에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하고요. 

 
 임마누엘의 가족은 편안하지는 않은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명랑하고, 생활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9]


  서독에서 귀국해서 대학원 시절에 알고 지내던 아내와 살림을 차렸습니다. 구마모토의 부모님은 일본인 여성과의 결혼에 처음부터 찬성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재일 코리안과 일본인 커플의 이런저런 케이스를 보아 온 탓이겠죠. 그러나 아내의 사람됨을 알고 끝내 받아들여주셨고, 그 뒤로는 늘 버팀목이 되어 주셨습니다. 


<신혼생활은 사이타마현 아게오시의 공단주택에서 스타트. 1년 정도 지나 아들이 태어난다. 그러나 양수를 들이마셔 의사는 생존 가능성을 반반이라고 언급. "내일까지 상황을 보시죠"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탄생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저는, 깊은 어둠에 빠져버린 심정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도 모른 채로 비내리는 거리에서 새벽까지 그저 걸어다닌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음날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180도 기분이 변해 사방이 빛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들은 우리 부부의 보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존재에게 얼마나 큰 힘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아이가 나중에 먼저 세상을 떠나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중에 태어난 딸도, 힘을 한 가득 주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에는 확실히 앞으로 등을 떠미는 힘이 있습니다.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전반 시절은 한마디로 말하면 빈곤과 소수자로서의 문제 등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세상이었죠? 저는 한층 들뜬 사회 분위기에 강한 위화감을 느꼈고, 실제로 어두운 생각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호경기를 배경으로 85년에 프라자 합의를 거쳐 버블 경제기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는 밝은 색채를 띄고 있었습니다. 국력은 미국을 뒤쫓아가고 있다는 견해가 확산할 정도였습니다. 일본형 경영을 높이 평가하는 미국의 사회학자 에즈라 보겔의 [일본은 No.1]은 그 시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지도교수의 도움으로 대학의 비상근강사가 되었습니다. 과외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논문을 썼습니다. 앞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바쁘기만 한 30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10]


 원래 저는 조용히 살고 싶다는 타입이지만, 뭔가를 결심하면 단번에 대범한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가출을 해서 도쿄에 갔던 것처럼 말이죠. 


 1980년대 전반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는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지문날인이 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걸 거부한 재일 코리안이 체포되는 등, 파문이 퍼지고 있었죠.  저는 날인이라고 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재일이지만 일본인이라는 인식이었는데, 시대가 바뀌어 외국인으로 관리를 받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꽤 큰 저항감을 가졌습니다. 날인에 대해 어머니에게 여쭈어보니 '왜 도둑놈 같이 홀대를 받아야 하는거냐'고 한 마디 하셨고,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습니다. 일본 사회에 대해 '주제넘는 언급'은 하지 않는 부모님의 슬픈 표정에, 저는 날인거부를 표명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강 교수의 거부표명은 당시 살고 있었던 사이타마현에서 '제1호'였다고 한다. 현지 신문이 크게 다룬 결과 지원의 외연이 넓어진다>


 당시는 정규직도 아닌 비상근강사 신분이었으므로, 실제로는 불안감도 있었죠. 그래도 현내 최초의 거부라는 점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힘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지탱이 되었던 것은 지역 교회의 목사였던 도몬 가츠오씨의 존재였습니다. 예리한 통찰력에, 행동력도 있어서 인망이 두터웠죠. 지역의 리더 같은 분이이었습니다. 


 지문 날인에 결코 응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체포당했겠죠. 제가 뜻을 굽히지 않아서 지속되던 운동에도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습니다만, 1년 뒤 날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문제는 제가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일본인에게 있다. 도몬 씨는 그런 식으로 마음에 스며드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결국 도몬 씨와의 인연이 시작되어 국제기독교대학의 요청으로 드디어 정교수로 채용될 수 있었습니다.


[11]


 교수로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을 만나 왔을까요. 국제기독교대학을 거쳐, 40대 중반부터는 십여 년을 도쿄대학에서 지냈습니다. 지난 봄부터는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의 진세이학원에서 학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학생들과는 가능한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요.


<강 교수가 오랜 기간 연구해 온 막스 베버와 고교시절부터 탐독해 온 나쓰메 소세키. 정치, 경제, 사회 등을 폭넓게 연구해 온 세계적 천재와, 후세에 남는 다채로운 작품을 남긴 작가는 서로 방법은 다르더라도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런 삶의 의미를 내면에서부터 확립하려는 자세에 이 둘의 장점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데올로기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유토피아 따위도 엉터리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즉 대지에 발을 붙인 실용적인 자세라는 점이죠. 


 그리고 정치학, 정치사상사를 전문으로 하는 교육자로서는 일관적으로 전달해 온 것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정치를 자기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힘을 얻었으면 하는 겁니다. 정치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 각자가 살아가는 데 필요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회에는 '나는 잘 모르니까요'라고 하면서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 더 인간적이라는 듯한 인식이 점점 넓어지고 있지 않나요.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치와 거리를 두는 태도는 20세 정도까지의 저처럼 자신의 내부에 성을 쌓고 문을 닫아 걸고 사회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는 결국 자신을 계속 아프게 할 따름입니다. 도망치지 않고, 가볍게 보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타인을 찾는 것이 '정치적 만남'의 첫걸음입니다. 작은 모임이라도 좋으니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과 만나 지혜를 함께 나누는 겁니다.  


[12]


 헤이세이 초기부터 TV에 때때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심야 토론프로그램인 '아침까지 생방송!'(TV아사히 계열) 등이죠. 


<사회의 후위에 머물고 싶다, 이것이 강 교수의 바람. 남들의 눈에 띄는 것이 힘들어서 출연에는 긴장감이 뒤따르지만, 한편으로는 성취감도 있다고.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에게 목소리가 닿으면, 놀랄 정도의 반향도 느낀다고 한다.>


 사실 왜 TV에 나가게 됐느냐고 하면요,  기본적으로 제가 부모님 같은 재일 코리안 1세대의 바람을 등에 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1세대는 사회의 틈새 같은 곳에서 살아온 분들이 많아서 남겨진 사료도 적습니다. 선거권도 없었죠. 일본 사회에서는 존재감이 극히 엷었던 겁니다. 세상에는 '스테레오타입'이라는 게 있죠. '재일 한국인은 역시...'라고 하는 식으로 말들을 하고는 합니다. 그걸 조금이라도 부수고 싶었던 거죠. 예를 들어, 외교 문제가 일어나면 재일 한국인에게 한반도에 있는 본국의 이미지가 투사되거나, 역으로 일본인이 재일 한국인을 통해 본국을 판단하거나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징화되는 것에는 저항감이 있습니다. 한 명 한 명으로서 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할까요. 이 사람은 이 사람으로서 발언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지면 좋겠습니다. 재일 한국인으로 뭉뚱그리지 말고요. 


 차별이라는 것은 다양한 가능성이 있음에도 하나의 틀에 가둬버리는 것입니다. 스테레오타입이라는 것은, 그런 어두움과 통해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재일 한국인은 일본열도에서 일본인과 같이 운명을 나누는 존재라는 점을 전하고 싶습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든, 대지진이 발생하든, 우리들도 함께 같은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죠. 


 다만 지명도가 올라갈수록 소모감이 커졌습니다. 미디어와 대학을 오가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반쯤은 공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어딘가 한적한 곳에 있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버시가 드러나 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10년 정도가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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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쯤 됐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규슈 아마쿠사의 바다에 낚시를 하러 갔을 땝니다. 엄청난 월척이 걸려서 낚싯대를 들어올리니 물고기가 점점 수면으로 올라왔습니다. 그걸 본 아들은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더니 '풀어줘'라고 절규했습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울어대면서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아들은 상냥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나중에는 개나 고양이를 살처분하는 상황을 알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적도 있습니다.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마음이 남들보다 훨씬 깊었던 겁니다. 


<강 교수의 아들은 10년 정도 전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모두 오래도록 건강하길, 이라는 말을 남기고. 극도의 신경과민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다 끌어 안을 수 없는 슬픔이 덮쳐오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 법이죠. 뭔가 깜깜한 어둠 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습니다. 저도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대로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다지 아들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이야기를 듣고, 어떤 주간지에서 취재 의뢰가 왔습니다. 저는 중간쯤 공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듣고 취재에 응했습니다만, 저도 가족들도 상처를 입었죠. 


 "세계의 비참함은, 우리들 내부에 있는 것이다." 언젠가 그렇게 말했던 그 아이의 순진함을, 저는 아버지로서 정말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요.


 1950년에 태어난 저는, 말하자면 고도성장기의 대표주자. 상승을 거듭하던 시대에 사회의 구석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재일 코리안 1세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랐습니다. 불평도 하지 않고, 일하고 또 일한 부모의 마음을 짊어지고 살아 왔습니다. 그 결과 남은 것은 큰 것과 강한 것, 그리고 분발하는 것만을 존중하는 사고 패턴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순수함 이상의 불안을 껴안은 탓에, 선악을 함께 받아들이는 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딘가에서 기어를 바꿔서 그 아이의 생각을 충분히 헤아려야 했던 겁니다.  참담한 부끄러움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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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마른 편입니다만, 의외로 잘 먹습니다. 마음이 가라앉아 있을 때에도 아침식사를 할 때 '저녁은 뭘 먹을까' 같은 말을 해서 가족들이 질린 표정을 할 때도 있습니다. '식(食)'이라는 것만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는 어머니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70세가 됩니다만, 큰 병 없이 살아왔습니다. '먹는다'는 것을 소중히 했던 어머니가 이런 토대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겠죠. 


<강 교수는 최근 불현듯 어머니의 말이 떠오른다고 한다. [어머니의 가르짐, 10년 후의 '고민하는 힘']이라는 책도 냈다. 이런 말로 기록한다. "봄은 말이다, 모든 게 새로워진단다. 역시 봄채소는 영양분이 많아. 봄에 좋지 않은 것들만 먹으면, 여름에 쉬이 지치고 만단다">


 14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일본 이름은 '하루코'였습니다. 지금 계절을 가장 좋아하셨죠. 책에도 썼습니다만, 자주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사람은 먹는것으로 존재하는 거란다, 라고요. 


 인간을 '걷는 식도'로 보는 입장에서는 훌륭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유복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입으로 음식을 넣고 항문으로 내놓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가나했던 시절에도 계절에 맞는 먹을거리를 사용한다. 지금 와서 보면 먹을거리에 쓸데없는 것을 넣지 않았습니다. 체온을 떨어트리는 것은 만병의 근원이라고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심플한 사고방식이 고원에서 살고 있는 지금 몸에 스며듭니다. 제철 재료를 먹으면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어머니의 만년을 되돌아보면, 나이를 먹어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집안을 일구고, 만년에는 형님이 물려받았습니다. 그때부터 표정이 편안해지셨죠. 이제 충분히 살았다,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를 연구해 왔습니다만, 양쪽 모두 후천적으로 익힌 것들입니다. 어머니의 말은 역시 다르죠.  살아가는 '방법'인 동시에 죽어가는 '기술'을 전해주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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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自由)라는 말은 '저절로 이유를 갖는', 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야 자유롭게 되었구나, 하고 느끼고 있죠. 끌어안고 살아온 것들을 이제 조금씩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상황입니다. 나름대로의 생각을 짊어지고 살아온 저희 부모님같은 재일 1세대도, 이제 거진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든 행동에는 때가 있다". 구약성서에 있는 이 말은, 강 교수의 좌우명이다. 모든 일에는 일어나야 할 타이밍이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부모님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건 물론 슬픕니다. 그래도 돌아가신 지 시간이 꽤 지나, 어떤 종류의 해방감도 생겨났습니다. 그만큼 강렬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국적에 대해서도 한국이 됐든, 일본이 됐든, 그다지 신경쓰지 않게 되었죠. 양국 관계가 평등하게 정착된다면 언젠가는 일본 국적으로 바꿀 수 있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정도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믿을 수 없는 발상이죠. (웃음) 이제 '재일'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도 되지 않을까, 하고요.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것이죠? 그런 의미로, 아들의 삶은 저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지금도 살아가는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삶보다는 짧았지만, 아들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았던 것은 변치 않는 사실입니다. 


 아들이 남긴 것은 슬픔도 괴로움도 지니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깊이가 있는 선물입니다. 그걸 모두 모아서 그가 살았던 증거를 확실하게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아들과 같은, 젊은 연배의 사람과 만나면 마음으로부터 응원하고 싶어집니다. 소중한 것은 시대와 세대라고 하는 '만들어진 것'으로부터 이탈해, 자기만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걸 통해 타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고희가 가까워진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만으로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다는 걸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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