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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날 Jun 26. 2023

Q. 나는 왜 일하는가?

A. 모래알만큼의 ‘자기 효능감’


여날님, 왜 일하세요?라고 묻는다면, 정형화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


“돈이 필요해서요. 먹고는 살아야지요.”

“글쎄요. 어디엔가 소속되어야 하지는 않을까요?”

“무엇보다 안정을 추구하기 위함이지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요.”

“부와 명성을 위해서요.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지위를 가지고 싶어요.”

“남 앞에 그럴듯하게 보일 명함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실제로, 내가 그동안 일을 해왔던 이유기도 하다. 그와는 별개로, 일을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묻는다면 대답은 달라진다. 지난 13년간 마케터로서 종사해 오면서, 일로 인해 가장 기뻤던 순간은 ‘자기 효능감’을 획득했을 때이다. 그것을 보람이라고 하던가? 잘 모르겠다. ‘자기 효능감’은 ‘내가 스스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무엇을 해낼 수 있다’라는, 즉 자기 능력에 대한 ‘놀라움’과 ‘확신’에 가깝다.


뚱딴지같은 날에, 홍두깨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라는 업무 지시가 떨어진다. 기습적인 요청에 마땅히 수반되어야 할 머쓱함이랄지 무안함 같은 것은 없다. 지시는 대부분 간단하면서 모호하다.


“자, 모월 며칠에 야구장을 제공해 줄 테니, 창립기념일 행사 겸 고객 대상 오프라인 프로모션을 기획해 봐. 이번엔 여날과장, 혼자 담당하는 걸로 해. 요즘 인력이 없어.”


멍석을 깔아 줬으니 너 맘대로 해봐라, 이거지. 예스, 노는 자기가 할 테니.


자, 이제 2주의 시간이 주어졌다. 기획도 준비도 실행도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릿속은 패닉이었지만 겉으로 티 내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1. 언제: 모월 며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2. 어디: 잠실 종합운동장의 야구장

3. 무엇을: 1) 창립기념행사 / 2) 고객 대상 야외 프로모션

4. 어떻게: 1), 2) 이벤트 준비, 식음료 준비, 좌석 확인, 인원 확인, 경품 준비 등등  

5. 왜: 직원 애사심 고취/ 자사 제품 인지도 견인, 기존 고객 충성도 제고 및 신규 고객 유치


이렇게 첫 기획서의 식상한 개요가 만들어졌다. 준비해야 할 실무 사항은 아래와 같았다.


1. 임직원 자리 배치 확정

2. 고객 추첨 및 야구 경기표 배송, 자리 배치 확정

3. 행사 당일 야외 프로모션 진행: 경품 증정 룰렛 게임, 인스타그램용 사진 찍기, 기타 게임 등

4. 상품 전시관: VMD 기획, 집기 제작, 진열 상품 선정, 상품 배치

5. 야외 프로모션 집기 제작: 룰렛 기기, 배너, 현수막, 손부채 등

6. 식음료 준비: 치킨, 김밥, 스낵, 맥주, 음료 등 (넉넉한지 모자랐는지 알 수가 없음)

7. 기타 준비: 음료냉장고, 아이스박스, 천막, 게임용 집기 등


2주간의 초조감과 불안과 공포 속에서 나는 얼마나 숨죽여 또는 소리내어 광광 울었던가. 차라리 내가 어떻게 되기를 (나쁜 말), 회사가 어떻게 되기를 (역시 나쁜 말), 지구가 어떻게 되기를 (최악의 말) 바랐다.


때는 8월, 음료를 넣을 야외 냉장고 대여 요청이 비용 문제로 반려되어 울었다. 아이스 박스를 구할 수 없어 울었다. ‘삼다수’만 마시는 대표님을 위해 편의점 5곳을 돌다가 굽이 부러졌다. 식음료 준비 전에 총무팀에 미리 업무 협조 요청을 하지 않아 ‘일을 그딴 식으로 하는’ 직원이 되었다. 인원이 계속 바뀌어 식음료 개수를 확정할 수 없었다. 동선은 암만해도 나오지 않았다. 밤 11시의 야구장을 홀로 걸으며 동선을 파악하였다.


업체와의 밀당도 만만치 않았다. 당일까지 준비가 된다는 곳도 있고, 준비가 어렵다는 곳도 있었다. 준비가 어렵다는 곳은 어떻게든 살살 구슬려, 혹은 반강제적으로 결과물을 쥐어 짜내야만 했다. 실랑이 속에서도 샘플은 퀵을 따라 나풀나풀 오갔다.


그래서, 2주 안에 이 모든 것을 끝냈냐고? 끝냈다. 그것도 1인 프로젝트 치고 아주 성공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도 두 주먹을 쥐고 흔드는 챔피언이 된 것만 같다. 나는 상사와 동료들의 칭찬 헹가래 속에서 자기 효능감을 만끽했다. “그것 봐, 되잖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거야.” 찬사(?)랍시고 던지는 상사의 한마디에 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안 좋은 선례를 만든 것 같아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누군가가 물었다. 도전적인 삶과, 안정적인 삶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이냐고. 도전이라, 날이면 날마다 고난도의 파도를 오르는 듯한 삶은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이 예측 가능한 고루한 삶 역시 택하지는 않겠다. 언제부터 도전과 안정이 양가불립한 관계였던가?


매일 같은 사람들과 같은 패턴으로 휴식해도 나는 행복하리라. 다만 서프보드를 들고뛰어 나갈 때는 오늘의 바람이, 내일의 파랑이 적당히 새롭기를 바란다. 바람을 안는 나의 손짓과, 바다의 등을 오르는 나의 발짓이 어제와는 다른 춤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능력 밖의 일은 앞으로도 허다하게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도조차 말 것인가. 어렵고 곤란한 일을 맞닥뜨리면,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수밖에.매일의 ‘자기 효능감’을 확인할 수 있는 소소한 방법이 말고 달리 있을까. 자기 계발서를 읽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에게 엄지 척! 을 날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적어도, 지금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잖아.


[다이어트 식단 모음: 소소하게 해 오던 것을 한데 모으니, 애쓴 흔적이 보인다.]


[하루 9 천보씩 걷기 운동이 쌓이고 쌓였다. 나의 건강을 위해 퍽 애썼던 집념이 무섭기도 하고 ^^^^;; 기특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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