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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널 G May 31. 2024

대청호의 여명, 수묵화의 여백

[2구간 노고산성 & 4구간 명상정원] #대청호오백리길

물과 산이 만나는 곳이면 그곳은 어김없이 마음의 안식처가 된다. 엄마의 품처럼 마음속 모든 근심과 걱정을 덜어내도 모두 받아줄 수 있을 것만 같은 포근함을 느낄 수 있어서다. 그래서 대전시민에게 대청호는 축복이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호수를 곁에 둔 대도시는 대전이 유일하다. 터널 하나만 지나면 빌딩숲 도시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힐링의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다.


이번 대청호오백리길 여정은 대청호 일출에 대한 희망을 품고 출발한다. 일출 조망 포인트로는 노고산성(2구간)을 선택했다. 노고산성 정상부엔 경건함을 주는 작은 종 하나가 설치돼 있는데 이 예술적인 종과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사진 한 장에 매료돼 이곳을 택했다. 물론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노고산성 일출 조망을 위해 몇 차례 도전했지만 사진 속 경이로운 순간을 영접하진 못했다. 스마트폰 날씨 앱에 표시된 이날 시간대별 날씨 상황은 ‘맑음’. “그래 또 한 번 올라가 보자.”


#. AM 04:10 일출산행

노고산성 산행을 위해 대청호가 조망되는 마을 정자인 ‘찬샘정’ 앞에 섰다. 아직은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 고요한 정적만 감돈다. 손전등에 의지해 나무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수도 없이 많이 이 길을 오르내렸지만 야간 산행은 모든 것이 낯설다. 긴장감 탓에 가쁜 숨을 몰아쉬어도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얼마나 올랐는지 가늠이 안 되니 정상에 대한 흐릿한 목표만 머릿속에 남는다. 쉬엄쉬엄 20여 분쯤 올랐을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꼬끼오∼’ 암탉의 울음소리에 아침이 열리고 새들의 청명한 지저귐에 노고산도 깨어난다. 하늘에 파란빛이 감돌고 조금씩 시야가 넓어진다. 예감이 좋다. ‘드디어 보는구나.’ 조금 더 힘을 내 노고산성에 오른다. 아침 5시 언저리, 붉은 아침 해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대청호 건너 끝없이 펼쳐진 산줄기들의 향연 위로 동이 튼다. 대자연의 장엄함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런데 갑자기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앗! 안개다.”


아침 안개는 순식간에 짙어져 붉게 물들어가던 여명을 집어삼킨다. 이번에도 대청호 일출은 ‘맛보기’에 그치고 만다. 짙은 안개가 거센 바람을 타고 노고산 산등성이를 넘어 대청호로 흘러들어간다. 안개에 휩싸인 노고산성이 신비로운 모습을 선사하지만 일출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다. 이제나저제나 걷힐까. 하염없이 야속한 안개가 사라지길 기다려보지만 이번에도 대청호의 장쾌한 일출을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덕을 더 쌓아야 하려나.’

싱그러운 초록이 선명해진 아침,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노고산성에서 하산한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 발걸음이 무겁다. 그래도 또 다른 기대감을 품고 힘을 낸다. 하산하는 동안 안개가 많이 걷히긴 했지만 여전히 대청호의 모습이 뚜렷하진 않다. 찬샘정에서 몽환적 풍경을 자아내는 대청호를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마음을 추스른다.


찬샘정은 ‘찬샘내기(냉천부락)’라는 마을지명을 따온 것인데 이 마을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얼음같이 찬 샘물이 흐른다고 해서 찬샘내기라는 지명이 전해져 내려온다. 찬샘정 한켠엔 망향비도 세워져 있다. ‘산 좋고 물도 좋은 내 고향 냉천땅에서…’로 시작하는 이 망향비엔 수몰민의 고향 사랑이 깊게 새겨져 있다. 한없이 평화롭기만 한 대청호, 그러나 그 안에는 수몰민의 애잔한 추억이 녹아있다. 이곳의 행정적 지명은 대전 동구 직동(稷洞)으로 ‘피골’이라는 마을지명에서 유래하는데 한자를 잘못 차용했다. 원래 피골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대립했을 당시 병사들의 시체가 산을 이뤄 이들의 피가 산골짜기에서 쉼 없이 흘러내렸다고 해서 지명으로 전해지는데 볏과의 한해살이 풀인 피‧기장을 뜻하는 한자를 가져다 썼다.


#. AM 07:20 힐링산책

찬샘정을 뒤로하고 다시 대청호 명상정원 앞에 섰다. 다소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침 물안개의 신비로움에 휩싸여 재충전을 위한 산책을 하기 위해서다.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에 있는 명상정원은 대청호오백리길 21개 모든 구간을 통틀어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은 곳이다. 사진작가들의 ‘출사명소’로도 그 이름이 자자하니 두말 하면 입이 아프다. 사람들이 이곳을 사랑하는 건 힐링의 기운이 항상 충만해서다.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에 들어서는 순간 온갖 시름과 걱정은 사라지고 대신 재충전의 기운이 가득 차오른다.

명상정원한터에서 아침 산책을 시작한다.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제법 많다. 휠체어장애인도 큰 어려움 없이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덱길이 잘 조성돼 있어 접근성이 좋아진 영향이다. 명상정원을 한 바퀴 돌아나오는 거리는 불과 1㎞ 남짓이라 부담 없이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아침이 밝아오자 숲속 새들도 분주해졌다. 숲 곳곳에 설치된 각양각색의 인공 새둥지로 날아드는 새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작은 새들은 여기서 아침식사를 해결하기도 한다. 다람쥐들도 도톨이를 찾느라 이리저리 바삐 움직인다.


전망쉼터에 다다르자 안개 자욱한 드넓은 대청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대청호 수위가 낮아지면 모래곶이지만 수위가 오르면 섬이 되는 ‘홀로섬’을 바라보며 다시 명상정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무장애 여행을 위한 추가 덱길 조성이 한창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명상정원이 조성되기 전만 해도 이곳엔 ‘슬픈연가 촬영지’ 푯말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다 대청호 관광자원화에 대한 요구가 대두되면서 이곳에 대청호의 명품 정원이 탄생했다. 명상정원은 대청댐 건설로 인한 수몰 전 마을의 모습을 담은 아기자기한 조형물들로 꾸며졌다. 옛 돌담이며, 대청마루며, 장독대며 대청호 조성 전 마을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조형물들을 중심으로 휴식공간이 마련됐다.

대청호반이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듯 명상정원도 대청호의 풍경과 어우러져 이곳에 올 때마다 재발견이 이뤄진다. 맑고 경쾌한 수채화의 느낌도 있고 이번처럼 안개가 끼거나 흐린 날이면 수묵화의 은은한 느낌도 있다. 마치 무릉도원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명상정원의 끝자락에서 홀로섬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홀로섬에 우뚝 선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저 멀리 또 다른 홀로섬 하나,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대청호 지형을 따라 이어지는 호반의 그라데이션, 대청호의 운치를 더한다. 시커멓게 그을린 마음의 상처는 금세 치유되고 오랜만에 만끽하는 마음의 평온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예술인들이 이곳에 새롭게 터를 잡고 창작의 희열에 빠져드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대청호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예술적 영감을 준다. /이기준 김동직 박동규 차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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