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는 딱 공무원 마인드다."
지난 주 화요일 개척팀에서의 첫 발표를 탈탈 털리고 난 후, 팀장이 날 가리키며 말했다. 전국 실적 1등을 세 번이나 달성하고 특진까지 달성한 팀장이다. 사람 보는 안목 하나는 제대로일 게 분명하다. 직설적이면서 예리한 지적에 웃음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얼굴은 이미 울상이었는데 말이지.
그 의도를 알아차리긴 어렵지 않았다. 아마 나를 자극시키기 위함일 테다. 그랬다면 성공이다.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갔으니까. 아직 첫 날인 만큼 만회해서 팀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리라 다짐했다. 허나 다짐으로 끝났다. 나름대로 애를 써봤지만 매니저(舊. 야쿠르트 아줌마)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얻은 게 없으니 발표에서도 어버버. 반복만 하며 일주일이 흘렀다. 마지막 발표 때 "얘는 내가 한 달 데리고 있으면 인간 만들 수 있는데"가 만회라면 만회랄까.
진심으로 내가 살아온 길에 대해 고민하게 된 일주일이었다. 그래도 30년 열심히 살면서 배운 지식, 기술 중에 현업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당장 매니저님을 설득은커녕 "내일은 다른 여사님 따라가라"는 소리 들었으니 말 다했다. 차라리 다 같이 헤맸으면 덜 억울했겠다. 하지만 3명의 동기들은 스펀지 마냥 팀장에서 배운 걸 그대로 써먹고, 심지어 정기고객까지 만들어오는 것 아닌가. 점점 벌어지는 격차에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난 주 목, 금요일에는 연수원에 인턴 전원이 모여 각자 OJT를 하며 겪은 문제점과 개선사항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를 가졌다. 와, 일주일 겨우 넘는 시간 동안 이런 걸 해오다니. 입이 다 물어지지 않았다. 나는 어땠냐고? 박살났다. 연단 앞에 서니 갑자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마이크를 잡은 손도, 목소리도 달달 떨려서 진행이 불가능했다. 오죽했으면 격려의 박수가 한 번 더 나왔으니 말 다했다. 곧장 집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회사는 이럴 줄 알았는지 경기도 양평의 고립된 곳에 우리를 가둬놨더라.
혼란은 파도처럼 거세게 몰아쳤다. 사실 나는 이 회사에 입사한 걸 몹시 못마땅해 했다. 알음알음 알게 된 동기들의 학벌과 같은 스펙이 나보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내 꿈을 잠시 미루고 택한 입사의 길 아닌가. 그 공허함을 채울 보상이 어떤 식으로든 필요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흠만 자꾸 눈에 보였다. 모난 마음은 점점 삐뚤어져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에 괜히 들어온 것 아니야?"란 화살까지 품게 되었다.
이제보니 알겠다. 지금 내가 내세울 건 학벌 말고는 없다는 사실을. 나머지는 다 자격미달이다. 나보다 한참 어린 동기가 "우리 부모님 또래는 여성들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중년 여성에게 집중적으로 시음을 권했다"고 말하는 걸 보고 무릎을 탁 쳤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 눈을 못 마주치고 있는데 말이다.
발표에서 어버버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내 스스로 발표 내용에 대해 자신이 없으니까 기부터 죽어서 암말도 못한 것이다. 그 말은 현장에서 해낸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정 모르겠으면 물어보면 되는데, 어줍짢은 자존심으로 도움조차 안 구해서 더욱 문제였고. 분명 나를 걱정하며 손을 내민 이들은 많았다.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의 면접 발표가 있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하는 영화 <접속>을 보기 위해 상암동을 찾았다. 비는 시간에 겸사겸사 알고 있는 피디님을 만났고. 피디님은 몇 년째 꿈에 매달리면서 감정을 소모하는 내가 안 쓰러웠는지, 일반 사기업은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지금 발표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떨어지면 쪽팔리니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다가 상영관에 와서야 면접 결과 발표를 알리는 문자가 왔음을 알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들어가 보니 합격. 동시에 상영 시작. 영화 내용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하필 <접속>의 한석규가 PD일 줄은 몰랐다. 내 꿈이 저 스크린 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현실은 입사 여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몸뚱아리라니. 안 그래도 일부러 좋은 기운 받고 싶어서 피디님까지 만났는데. 분기점에서 어긋난 선로를 달리는 열차와 같다고나 할까.
<접속>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바로 위의 사진이다. 한석규와 전도연이 같은 지하철에 탄 지도 모르고 서로를 떠올리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웬 사내가 걸어 들어온다. 서툰 발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 어눌한 발음을 고치고, 친구들도 사겨보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이 자리에 서게 됐다고.
상영관에서 볼 때는 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왜 저 장면이 들어갔는지 알겠다. 내 현실이거든. 피디가 되겠다고 큰 소리 치고 다녔지만 현실은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 못하는 내 신세. 헛똑똑이 인생. 멀쩡이 선로를 따라가는 게 이리도 힘든 줄 몰랐다.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