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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사리 Jan 07. 2025

20210409-미생

꼴에 정규직은 되고 싶어서

단체 생활에서는 눈에 안 띄는 게 상책이라고 보고 듣고 배웠다. 일로 엮이는 관계면 더더욱. 고로 이번 인턴 생활에서 그러려고 했다. "이런 사람이 있었다고?"란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히. 적당히 묻어가서 합격 목걸이만 가져가자. 뭐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개뿔. 내가 제일 눈에 띈다. 일단 나이가 많다. 있는 그 자체로 집중 관리 대상인 셈. 거기에 사회물 덜 빼고 회사 들어온 바람에 좀 많이 거들먹거렸다. 지나가는 사이로 따가운 눈총이 느껴진다. 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현 부서에서 연수 받는 동기 중 반장을 맡았다. 뭘 해도 첫 번째 순서, 대표로 대답해야 한다. 동기 사이의 관계도 챙겨야 하고. 잘 하고 있냐고? 그랬으면 여기에 또 찡찡 대지는 않았겠지.


오늘 눈을 떴는데 7년 전에 봤던 웹툰 <미생>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원인터내셔널의 인턴 김석호. 다른 회사에서 인턴을 하다 들어와 나이가 많다. 장손인지라 결혼도 했다. 허나 일머리가 서툴러 나이값을 못한다. 급기야 딱풀로 인해 장그래에게 피해를 끼친다. 설명만 보면 한숨만 나오지만 정규직 입사에 성공한다. 열정적이고 가진 능력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


내가 지금 딱 그 꼴이다. 아, 피해 끼치는 것까지만. 나이 어린 선배들에게 깔보이기 싫어 일부러 의기양양한 척했다. 단 하루 만에 박살났다. 판촉 활동의 후유증을 못 벗어나고 있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겁부터 난다. 다른 동기들은 잘만 활동하고 심지어 정기 고객까지 유치해오며 저만치 앞서가는데 말이다. 사무실로 돌아오면 면목이 없어 쥐구멍에 숨어들고 싶어 죽겠다.


무엇보다 업무를 못 따라가서 큰일이다. 영업 일을 해본 적이 없다. 관심 가진 적도 없다. 그러니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른다. 일주일이나 있었는데도. 그 사이 회사가 요구하는 수준은 단계적으로 올라가버렸다. 따라가질 못하니 매일매일 제출하는 보고서와 발표 자료는 허점투성이다. 결국 오늘 팀장한테 한소리 들었다. 이대로면 너를 계속 보긴 힘들 것 같다고. 이보다 묵직한 경고가 어디 있을까.


돌아보면 나는 습득력이 늦은 사람이었다. 엉덩이가 무거워 남들을 겨우 따라잡아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따라오기까지 기다려주길 바랐다. 근데 여기 회사다. 돈 받았으면 그 값을 해야 한다. 심지어 나는 일하는 태도와 성과를 보며 정규직 전환 여부를 평가받고 있다. 나따위를 기다려줄 시간은 없다.


내가 여기서 일을 더 못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둘 다 문제다. 7주는 버텨보자는 각오로 들어왔다. 지금 그만두는 건 포기다. 그만둠 당하는 건 낙오다. 어떻게든 불명예인 셈. 오도 가도 못하는 이 상황에 한숨만 나왔다.


동기들을 모았다. 사실대로 말했다. 이 일이 나랑 안 맞는 것 같다고. 그래서 더는 못하겠다고. 고꾸라지게 냅두지 않는 동기들이라 다행이었다. 힘들고 안 맞는 건 다들 마찬가지라고,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뜯어말렸다. 대체 누가 형이고 오빠인 건지. 거대한 짐짝이 되어버린 현실에 헛웃음이랑 눈물이 같이 나온다.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미생>의 김석호는 합격했다. 열정을 보였고 여러모로 가진 능력이 있었기 때문. 그 쓸모를 위해 본사 지원 업무를 맡는다. 자연스레 내 목표가 되었다. 부끄럽지만 동기들 중에 스펙이 꿀리지는 않는 편. 시키는 일만 하면 그럭저럭은 할 수 있다는 건 나도 알고 팀장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영업하라고 뽑은 사람을 지원 업무에만 써먹는 건 좀 애매하다. 커리어 성장에도 도움되지 않고. 아마 팀장도 답답해서 지금 한숨만 쉬고 있을 테다.


렵다 어려워. 내 인생 어떡하지. 그렇게 금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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