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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사리 Jan 07. 2025

20210407-마와리

이상과 현실

마와리 [일본어]mawa[回]ri : 1. 명사 기자들의 은어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관할 경찰서를 도는 일.

    

네이버 뜻풀이로는 이렇다고 한다. 언론사 면접장에 존재하면서도 가끔씩 기자를 망설였던 건 마와리 때문이었다. 다짜고짜 경찰서에서 쳐들어가 사건을 캐오고, 수시로 선배들에게 보고하는 일이 좀 쉽겠나. 어설플 수밖에 없다. 그럼 또 어설프다고 개털린다. 잠도 못자고 이 생활을 반복하며 수습 시기를 보내야한다. 마와리가 신입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당연하게도 경찰서를 도는 경험을 하진 않았다. 다만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갑자기 주식시장 개황이나 회사 분석 자료, 통계치 등을 보내라고 한다.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는 안 알려준다. 일부러 안 알려주는 거다. 얘 얼마나 해보는지 보려고. 그야말로 뻘짓을 반복하게 된다. 조금 익숙해질 때쯤에는 아이디어를 제시해야 한다.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했는데 뭐 아는 게 있을까. 그럼 또 어떻게든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 나서야한다. 발로 뛰고 무작정 전화도 해보면서.


당하는 입장에서 마와리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우물가에 사람 빠뜨려놓고 살려달라고 손 흔들 때까지 지켜보는 꼴 아닌가. 괜히 서로 힘들게 말이다. 더구나 습득력이 떨어지는 인물이라 남들보다 내놓는 결과가 많이 더뎠다. 누구 하나라도 손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방황하진 않았을 텐데. 종종 원망한다.

     

이제보니 온 세상이 우물가였다. OJT 교육이 끝나자마자 영업점으로 투입됐다. 그리고 사흘간 여사님과 동반 근무. '야쿠르트 아줌마' 옆에 졸졸 따라다니느라 시선이 쏟아지는 걸 빼면 할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뭐 이미 해보기도 했고.


착각이었다. 함께한 선배는 내게 야쿠르트가 한가득 담긴 봉지와 상품 소개를 담은 책자를 쥐어줬다. 그리고 훠이훠이 손짓을 했다. 배달 가는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에게 나눠주라는 소리다. 영업. 그 심오한 의미를 실감했다. 그리고 그 일을 이제 내가 해야한다. 돈 벌려면.


31년 살아온 가치관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를 바라보던 경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내가 받는 입장이었어도 그럴 것이다. 일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영업사원이 대뜸 들어와 음료 한 잔을 권한다면. 하지만 이제 나는 주는 입장이다. 흔들리지 않고 최대한 밝게 응대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내 고객으로 만들어야 한다. 괜히 야쿠르트를 보급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야쿠르트라는 게 참 애매하다. 눈앞에 있으면 먹는데 굳이 사먹을 정도까진 아니다. 야쿠르트보다 맛있는 건 지천에 널렸고, 몸에 좋으려면 영양제를 사먹으면 된다. 근데 어떻게든 설득해서 고객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한 달에 스무 번은 사먹는 정기 고객으로. 이유는 물을 필요가 없다. 그게 해야 할 일이니까.


자신이 없어서 그대로 집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꼴에 돈 번다고, 다리 아프다고 택시도 타고 필라이트 대신 카스도 먹어보며 사치를 부린 게 떠올랐다. 아직 첫 월급을 받으려면 멀었다. 적어도 한 달은 채워야 '똔똔'이 된다. 꼼짝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했다.


겨우 마치고 돌아오니 시장 분석 발표를 하란다. 돌아다니느라 바빴지, 분석할 새가 있겠는가. 있는 그대로 말했다. 사람은 많은데 사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개털렸다. 사실 선배들은 이미 자료를 줬고, 대략적인 분석 방법도 알려줬다.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데 보일 리가 없다.


"지금 네가 발표한 건 전동 킥보드로 30분만 다녀도 알 수 있는 것들"이라는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고작 인턴이라고 적당히 넘어가려고 한 게 탄로 났으니 말이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온 사방을 찾아다니며 하소연을 했다. 스스로가 너무 쪽팔리기도 하고, 그렇다고 잘 할 자신은 없어서. 도망가지는 못하겠어서 더더욱 문제였다. 첫 직장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도저히 내가 잘 할 자신도 버틸 여력도 없다고 믿었다. 좀 더 편하게 일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3년을 돌고돌아 비슷한 일을 하고 자존감까지 무너져버렸다. 헛살았구나. 좀만 견디면 되는 거였는데 왜 그랬던 걸까. 내가 그렇게 하찮을 수가 없었다.


정신이든 오늘은 좀 사정이 나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생긴 건 당연히 아니다. 어느 부서로 가고싶냐는 선배의 말에, 집으로 가게 될 것 같다고 답할 정도였으니. 지금도 도망가고 싶어 미치겠다. 다들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하는데. 지나갈 수는 있을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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