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급의 변명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입사한 신입사원 송사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첫눈. 첫사랑. 첫키스. 모든 '처음'은 소중하다. 설렘과 걱정이 공존하는 첫 출근도 각별하긴 마찬가지.
그러나 첫 출근이 세 번이상 반복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켜보는 열에 여덟아홉은 슬며시 말을 꺼낼 것이다.
"쟤 폐급아냐?"
그렇다. 어느 조직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첫 출근만 반복하는 폐급이 여기있다. 폐급의 변명을 조금 길게 풀어보려고 한다.
중국 입시판에서는 문과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도 빈번해졌다. 3000만명 이상의 팔로어를 보유한 스타 입시 전문가 장쉐펑은 “인문계의 말로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되는 것”이라면서 “아이가 신문방송학과에 간다고 우기면 때려서라도 말리겠다”고도 했다.
<“취업난에 살 길은 명문대뿐” 中 수능 1342만명 혈투> 조선일보 2024년 6월 7일.
신방과가면 후회하는 건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신방과 진학을 꿈꾼다. 15년 전의 나도 그랬고. 전공에 빠삭해지는 만큼 기자와 PD, 아나운서 등과 같은 선망 직업이 가까워질 것이라 믿으니까. 하지만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이 말했다지.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막연했던 언론인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싶다 생각한 건 중학교 2학년 때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으면서다. 시경과 요정을 넘나드는 활동성.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과 일본의 투항에 기여하는 능력까지. 권순범 기자 그 자체가 너무 멋졌다. 기자를 장래희망으로 안 삼는 게 이상했다. 수능 준비가 지칠 때면 프랑스 파리 센느강 주변에서 바바리코트를 입고 국제 소식을 전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면서 버텼고, 신방과에 들어갔다. '언론고시'라고 흔히 부르는 언론사 입사 준비의 세계로 자연스레 투신했다.
그리고 내가 2021년 3월 출근길에 오른 곳은 논현의 한 식품회사였다. 3년 넘게 언론사 공개 채용에 매달렸는데 실력과 인성이 모두 부족했는지 필기와 면접에서 계속 미끄러졌다. 남들은 잘만 합격하는 언론사의 문턱이 내게만 너무 높고 좁았다.
여기에 코로나19 발발로 채용시장 역시 얼어붙었다. 그 사이 나는 서른을 넘겨버리고 말았다. 유통기한이 다가올수록 정가보다 할인된 바코드가 덕지덕지 붙는 신선식품처럼, 내 가치가 빠르게 하락하는 게 느껴졌다. 조급함을 견디지 못했고, 지원기업의 범위를 넓혔다. 감사하게도 '잘 안 알려졌지만 돈도 많이 주고 복지도 좋은 회사'께서 영업관리직 전환형 인턴으로 합격했다.
6주 뒤 식품회사를 나와야 했다. 준비되지 않은 영업사원에게 사회는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동기들은 제품을 하나라도 더 팔아 실력을 뽐내고 있는데, 나는 하나도 팔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진심으로 원했고 들어가고 싶은 직장을 나는 '플랜B' 정도로 생각했던 게 화근. 매일매일이 위기였고, 여기서 오래 일할 자신이 없었다. 회사도 나와 함께 일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세상살이의 잔혹함과 나의 안일함, 인간관계의 배신감 등을 짊어진 채 다시 백수가 됐다.
몇 달 후에는 보일러회사에 들어갔다. 오히려 언론인에 대한 갈증이 더욱 커졌다. 마침 간만에 신입사원을 뽑는 현 직장께서 기자로 일할 기회를 주셨다. 그렇게 1년이 안 된 사이에 첫 출근만 세 번을 했다.
서른을 넘어 시작하게 된 기자 생활. 역시나 쉬운 건 없었다. "제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더니 4년차를 맞았다. 뭐가 제일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기자의 기본 중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기삿거리 물어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찾아보니 기자협회 회원 수가 1만2000여명이다. 1만명이 넘게 기자라는 명함을 들고 돌아다닌다는 이야기. 새로운 취재 아이템은 고갈당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찾아오는 게 나의 과업이다.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온갖 홈페이지를 뒤졌고, 궁금한 게 있으면 전화도 여기저기 돌려봤다. 처음보는 사람한테 깊은 정보를 줄 리는 만무. "이 새끼 뭐지?" 하는 표정이 겹겹이 쌓였다. 그리고 만 2년 만에 몸에 탈이 나고 말았다. 수술을 받고 잠시 휴지기를 갖게 됐다.
과연 내가 계속 기자 일을 할 수 있을까? 병가 기간 수도 없이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내가 찾은 답은 'Yes' 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얻게 되는 정보가 흥미롭고, 이를 더 파고 드는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인정욕구 강한 내가 어쩌다 기사로 반향을 일으켰을 때의 쾌감을 말할 것도 없고. 아직 권순범 기자만큼의 성과를 못 내고 있긴 하지만.
그 확신을 얻기 위해 쓴다. 준비 안 된 영업사원이었던 내가 단독에 목마른 기자가 되기까지 몇몇 에피소드를 정리해봤다. 매일매일이 허둥지둥의 연속이지만, 영웅들의 에세이가 넘쳐나는 세상에 '반면교사' 할 만한 읽을 거리 하나는 필요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