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걸었어
2022년 12월 말의 어느 저녁. 직장 선후배들이 모인 단톡방에 한 기사가 공유됐다. 새벽부터 오전까지 경기 북부에 최대 15cm의 '눈폭탄'이 내린다는 소식.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내일 하루가 예사롭지 않을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마침 재난문자도 행정안전부, 서울시, 구청 등 소관기관별로 날라왔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제발 내일 차 가지고 나오지 말라는 호소로 느껴졌다.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네이버 지도와 카카오톡, 쏘카 애플리케이션을 번갈아 확인했다. 다음 날 경기 안성시 출장이 있었기 때문. 몇 주전 인터뷰로 인연을 맺은 중소기업 대표님이 당신의 회사로 나를 초대했고, 그게 하필 내일이었다. 이날을 위해 거금을 들여 차까지 빌린 상태였다.
무서웠다. 종종 운전을 하긴 하지만, 악기상 시에는 핸들을 잡아본 적이 없다. 베테랑 운전자들도 한겨울에는 차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아 곤혹을 겪는 기사를 종종 접하진 않나. 또 바로 서울로 돌아와야 해 쫓기듯 운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나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엄마한테 새삼 사랑한다고 말하고 출근해야 하나.
이성적인 해결책은 약속을 미루는 것. 그러나 최대한 피하고 싶은 수였다. 약속 상대는 세계를 무대로 움직이는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 방문 날짜를 다시 잡자고 하면, 바쁜 그의 사정상 최소 몇 주는 걸릴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당장 내일 쓸 게 없어진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안성으로 가야했다.
본네트에 쌓인 눈도 못 녹인 채로 겨우 회사 도착. 운전하는 내내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핸들을 쥔 팔에 힘이 무진장 들어갔다.
산업단지 꼭대기에 위치한 사장님의 회사는 생각보다 컸고, 당신은 맨손으로 회사를 일궈온 그간의 역사를 늘어놓으시기 바쁘셨다. 빨리 '내일 쓸 것'을 입수하고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내 속도 모른 채.
"내일은 뭐하세요 대표님?"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나도 모르게 속내가 튀어나왔다. 사장님은 다음 날 충북 청주시에 간다고 했다. 기업간거래(B2B) 회사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고객사의 수리·정비 요청 대응이 필수. 이에 고객사 공장 인근에 엔지니어와 수리 장비들을 상주시키는 일종에 서비스센터를 만들려 하신단다. 그리고 내일은 임원들이 다함께 찾아고 센터 부지에서 기공식 행사를 갖는 것.
됐다.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지만, 서비스센터 기공식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완전 따끈따끈한 소식이지 않은가. '뉴팩트 발제'라는 과업을 간만에 달성할 절호의 기회였다. 왕복 4시간, 10만원이 넘는 대차료, 빙판길의 무서움 등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내일 청주에서 사진 찍으시면 내게 좀 보내주실 수 있냐고 웅얼거렸다. 기사에 쓰려면 증거라도 있어야 하니까. 다행히 그 밑의 상무께서 기공식 기념사진은 물론 센터 미니어처도 송부해주셨다. 어디서든 구할 것 같은 재료로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고퀄'의 미니어처라 깜짝 놀랐다.
그렇게 순탄치 않았던 여정은 기사 출고로 마무리 됐다. 지면에 담긴 내 기사 크기는 딱 미니어처 건물 크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