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프레임 변화 절실
주 52시간 근무제 유예 제도가 올해 끝날 예정에, 대형 차세대 프로젝트 수행 기관 여기저기서 유예 기간을 늘려야 한다고 난리다. 그동안 얼마나 개발 노동력을 착취해왔는지 자백 타임을 갖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에서, 왜 이런 관행이 지속되어 왔으며,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먼저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다.
'소프트웨어 산업'의 가치 사슬 주체는 SW와 기술 그 자체이지만 '소프트웨어 응용 서비스 산업'은 가치 사슬 주체가 '엔지니어 노동력'이기 때문에, 가치 사슬의 진화 방법이 서로 달라야 했다. 수십 년 동안 SI 산업이라는 대표적인 정보시스템 구축 산업이 산업 프레임을 끌어왔고 아직 진행 중이다. 분명히 시장 성장과 성과도 있다. 하지만 이제 시효가 다 된듯한 느낌이다. 4차산업혁명의 주요 키워드들(AI, 빅데이터 등)도 정작 시스템 구축은 SI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왜 모든 키워드를 SI로 해내는 신기한 능력을 가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오피스 소프트웨어 개발 기업 근무를 하다가 엔터프라이즈 산업으로 진입을 했을 때가 96년이었다. 이른바 SI라는 산업에 대한 첫 경험을 아주 혹독하게 치렀다. 발주사 사무실 바닥에 라면 박스를 깔고 잠들기 일수였고, 새벽 동트는 것을 보고 찜질방에 들러 잠시 씻고 나와 다시 출근하기도 했다. 예전의 소프트웨어 개발은 디스켓에 담겨 판매되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그때 경험하지 못했던 이상한 소프트웨어 개발 작업을 하면서 뇌리에 박힌 생각은 '이건 소프트웨어 산업도, 소프트웨어 개발도 아니고, 그냥 노가다잖아!" 였다.
정보시스템 개발 위한 계약과 개발 방식을 바꾸면 엔지니어들이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치러야 할 대가도 있는데, 엔지니어들 스스로 혁신적인 역할 변화에 능동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현재 알고 있는 지식을 우려먹고,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보수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 세상에는 좀 더 나은 기술도, 방법도 많지만, 우리 산업 시장에서 접하게 되는 보편적 기술 산업 프레임에서는 이런 것을 다루지 않는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트랙터 쓰면 될 일을 곡괭이질 계속하고 있다. 심지어 고객사에서 요구까지 한다. 트랙터는 우리가 모르는 분야이니까 곡괭이질만 열심히 하라고. 그래야 수행사 바꿔서라도 계속 곡괭이질 시킬 수 있다고.
정보시스템 발주처(사용자)의 발주 품질에서부터 시작
'맨먼스 계약과 헤드 카운팅, 그리고 상주 개발' 은 공공과 기업 할 것 없이 관행적으로 해오는 정보시스템 구축 계약 방식이고, 이를 개선하거나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발주처에서는 RFP만 정확히 기술해 수행 업체에게 넘기면 된다. 몇 명을, 혹은 누구를 투입하는지 물어볼 필요 없다. 발주사에서 상주하기를 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커뮤니케이션'과 '보안'이라고 하지만 이를 해결할 방법은 널려있으니 핑계밖에 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곳에 개발자 두고, 불충분한 요구사항 계속 바꾸며 요구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나.
발주처는 명확한 요구사항이 들어 있는 발주 품질 향상에 힘쓰고, 전문 기업은 납품 품질에만 신경 쓰면 된다.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해결책임에도, 그동안의 관행과 권력, 그리고 .... 때문에 안 하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기술을 쓰든, 발주처의 비즈니스 요구사항과 타 시스템 간의 연동에 문제없으면 된다. 발주처가 프로그램 언어는 뭘로 쓰고, 프레임웍은 뭘 사용해야 하는지 일일이 지정하고 간섭하는 프레임에서 무슨 소프트웨어 기술과 산업이 발전하겠나.
발주처(사용자) 중심 산업 정책과 프레임도 후진기어 작동 원인
인터넷의 발달은 지식 확보에 큰 기여를 했고, 과거와 달리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 엔지니어 못지않게 기술에 대한 지식 습득 기회가 많아진 이유로, 사용자 기업 소속 엔지니어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 보편적 기술 기반 패러다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 소속 엔지니어들에 비하면 깊이와 내공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산업 프레임이 '사용자 중심' 혹은 '고객 중심'이란 흐름에 힘이 너무 실려 버려, 사용자 기업의 목소리가 산업 프레임을 쥐고 흔들기 시작하며 기술 발전을 역행하는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소프트웨어 전문기업 엔지니어의 수준도 함께 하향 평준화되고 있는 것도 부작용 중 하나이다. 과거처럼 전문기업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결국 전문기업은 고객의 큰 목소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것이 보편적 기술로의 기술 하향 평준화 사이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소프트웨어 제품을 만들어야 할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정보시스템 개발 인력으로 투입되기 일수고, 기업 연구소는 투입을 위해 언제든 준비된 인력 풀로 까지 여겨지고 있는 상황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사용자 중심 SW산업 정책이 전문기업 경쟁력 약화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새로운 소프트웨어 기술을 연구 개발해야 할 전문기업들은 발전과 도약의 기회를 SI 산업 프레임에 빼앗기고 있다. 발주처가 적용 기술을 본인들 수준에서 정해 버리기 일수다. 공공 시장이 특히 심한 이유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소프트웨어 개발 기술과 방법을 '국정화'해 버린 것은 정말 큰 실수다.
소프트웨어 강국이 오픈소스 한다고, 열악한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산업 현장에 '오픈소스 활용 극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소프트웨어 응용 산업과 사용자 중심 산업 정책의 대표적 사례이다. 오픈소스가 좋다 안 좋다, 옳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 경쟁력과 가치 사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먼저 생각해 보지 못한 어리석은 정책 이다. 무료로 사용되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니 사용자 측에서는 나쁠 것 하나 없지만, 이 시점에서 사라지는 소프트웨어 가치 사슬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들의 '오픈소스 적용' 프레임을 한사코 반대하는 이유를 들어 보기 바란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다.
SI 중심의 산업 프레임, 후진 기어의 가장 큰 원인
SI 산업은 소프트웨어 산업이 아니고, SI 기업은 소프트웨어 기업 아닌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다. 현재 SI산업 유형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서비스 산업이지 소프트웨어 산업은 아니라고 본다. 필자가 생각하는 소프트웨어 산업 정책은 소프트웨어 전문기업이 잘 성장할 수 있는 산업 프레임을 만들고 실행해야 한다. 그렇다고 SI 산업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4차산업혁명시대에 맞춰 SI산업의 Transformation(형질변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고, 현재의 개발 엔지니어 노동력이 최고 우선시 되는 SI산업은 없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소프트웨어 산업 정책은 소프트웨어 전문기업 성장과 기술력 향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정책 타깃의 '0점 보정'이 절실한 부분이다.
'주 52시간도 많다'라는 관점에서 시작했으면 한다. 시각이 바뀌어야 해결책을 찾게 된다. 노임 단가나 올리자고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징징 될 때가 아니다. 같은 수주 금액에 투입 인력 줄일 수 있으려면, 기존의 보편적 개발 프레임 사업으로는 힘들다. 노동인력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을 찾아서 (예, 자동화 도구) 절반을 줄여도 프로젝트 수행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기술력 향상을 해야 하고 프로젝트 수행 방법을 바꿔야 한다. 예전 것을 계속 우려먹으면서 상황 변화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으면 어찌 하나.
SI 산업은 근본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산업도 아니다. SI 식 정보시스템 개발은 '제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시스템을 가지고 글로벌 사업을 하겠다고 나서면, 보유 개발자를 항상 동봉 수출해야 할 것이고, 실패를 한 후 이런 핑계를 댈 것이다. "세계화를 하려면 , 해당 지역의 전문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 못하고 한국적인 것을 가지고 갖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라고 말이다. 이건 본인들이 다 해야 한다는 SI 식 사고방식 때문이다. 글로벌 사업을 왜 본인들이 직접 하나. 해당 지역의 자국민 파트너사가 수행하면 이질적 문화 나 사업 네트워크의 문제 같은 것 없다. 그런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완제품'화를 못하고, SI 식 결과물을 제품으로 오인해 사업하려고 달려들기 때문에, 지역 전문가 찾다가 멘토링 받으면서도 실패하는 것이다.
SI산업을 줄이면 줄일수록,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산업 발전에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가능한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소프트웨어 자체의 부가가치 사슬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기술 부채만 쌓고 있는 산업이다. 이제 SI 전성시대를 마무리 지을 준비를 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제값 받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제값 받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이 우선이고, 이런 소프트웨어가 시장 진입한 후 지속적인 진화 사이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산업 프레임. 우리에게 필요한 딱 한 가지이다.
인력 문제로 더 난리가 나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의 프로젝트 계약에 반영되지 않겠나. 유예기간 같은 것 두지 말았으면 한다. 인력 수로 일하던 SW 산업 관행에 종지부를 찍자. 인력 수를 늘려야만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는 기업들, 회사 규모와 상관없이 기술력이 떨어지는 회사일수밖에 없다.
정보시스템 구축 산업에 주 52시간 근무제가, 기술력 기반의 제대로 된 경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 같은 금액에 현재 시장에서 거래되는 투입 인력 수의 절반, 혹은 절반의 절반 만으로, 52시간 근무가 아닌 40시간 근무로 해낼 수 있는 기술 기업이 있다면, 그런 기업들이 성장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 기업들이 성장 기회를 잡으려면, 주 52시간 근무도 많다. 좀 더 조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