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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영 Feb 27. 2023

위로가 필요한 외로운 어른에게... 캣츠의 '메모리'

 어릴 땐 어른들이 드라마나, 뉴스를 보며 눈물 흘리는 일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면서 나도 부쩍 눈물이 많아진다. 어린 시절보다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의 종류가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시절 어른의 나이가 되고 보니 알 것 같다.


15년 전쯤인가 보다. 엄마가 친구와 뮤지컬 <캣츠>를 보고 와서는 내게도 꼭 한번 보라고 말씀하신 게 말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작년 11월 출근길.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전광판에는 2023년 오리지널 내한 공연 <캣츠>를 광고하고 있었다. 순간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핸드폰을 열고 폭풍 검색하여 5년 만에 부활한 하나 남은 '젤리클석'을 예매했다.


'젤리클석'이란, 젤리클 고양이 분장을 한 배우들이 관객석까지 내려와 움직이는 동선에 있는 좌석을 말한다. 단순히 통로를 오고 가는 정도가 아니라, '플레이 타임'에 실제 고양이처럼 사람에게 다가와 장난치다가 쌩하니 가버리는 등 다양한 고양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VIP 좌석보다 희소성이 높은 젤리클석은 언제나 품귀 현상을 빚는다. 운 좋게 젤리클석에 앉은 나는 손으로 직접 젤리클을 만지고, 서로의 눈과 눈을 맞추며, 각각의 젤리클의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었다.

 

▲ 뮤지컬 캣츠 오리지널 내한 공연 커튼콜 ⓒ 이은영

이밖에도 <캣츠>는 다른 뮤지컬과는 차별화된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배우들이 직접 자기 얼굴에 고양이 분장을 하면서 맡은 캐릭터에 동화되어 무대에 오르도록 하는 전통이다. 또 하나는 해외 공연 시 2부 시작곡 '메모리'는 개최국 언어로 부른다는 점이다.


또 다른 특이점은 서사가 무엇보다 중요한 뮤지컬에서 특별한 줄거리나 주인공 없이 두 시간 넘게 공연한다는 점이다. 각각의 고양이들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하는 방식으로, 다른 고양이들은 무관심한 척 연기하고 심지어 관객석으로 내려와 다른 고양이에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 시인 T.S 엘리엇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던 시에서 영감 받아 그가 쓴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가 원작이다. 엘리엇의 책은 서사가 있는 소설이 아닌 연작시이기에 뮤지컬로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공연 시간 내내 관객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다가 마침내 눈물까지 쏟게 만드는 <캣츠>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겨울, 나의 몸과 마음은 조금 지쳐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같은 매우 원초적인 질문을 나에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며 자기 인생에서 답을 찾아가던 수많은 작가가 남긴 글은 그래서 언제나 유용하다. 톨스토이는 오래 전 이런 글을 남겼다.


고뇌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참된 인생을 시작하지 못한 사람이다. 고뇌는 정신이 향상되어 가는 과정이다. 고뇌 없는 인생의 향상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고뇌를 통해서 불멸에 이른다. 그러므로 불행은 신의 사랑의 징표이다.


언제나처럼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집과 회사에 오가고 있을 때 사촌 여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그동안 육아로 인해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했다며 같이 '메모리'를 듣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날짜까지 변경하며 '젤리클석' 티켓 2매를 구입할 수 있었다.


공연 시작 4시간 전에 만나 광화문에서 함께 차와 식사를 즐겼다. 마주 보고 앉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한 사람이 입을 열면 한 사람은 귀를 열었고, 한 사람이 귀를 열면 한 사람은 마음 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드디어 세종문화회관으로 들어가 수개월 동안 기다려 온 <캣츠>를 함께 보았다.

▲ 캣츠 뮤지컬 오리지널 내한공연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캣츠 메인 포토존 (3월 12일까지) ⓒ 이은영

뮤지컬 <캣츠>의 줄거리는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고양이들이 무도회를 열고, 여기서 선택받은 단 한 마리 고양이만이 천상으로 올라간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젤리클 고양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고 뽐내며 선택되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성서 속 '돌아온 탕자'처럼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고양이 그리자벨라(조아나 암필)의 모습은 이질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한때 화려했던 고양이가 바깥세상으로 떠났다가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 젤리클 부족 고양이들에게 외면받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두에게 외면받던 그리자벨라가 2막 후반 절규에 가깝게 '메모리'를 울부짖을 때, 나는 울고 말았다. 그녀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에 깊은 위로와 공감을 받은 고양이들이 하나둘 다가와 귀를 기울이고, 고해성사와도 같은 자기 고백을 통해 그리자벨라는 천상으로 올라간다.


그리자벨라라는 외면받던 존재가 없었다면 이토록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캣츠>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성서 시편의 118장 22절 말씀처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이다.


인간의 눈물 섞인 기도가 신의 귓가에 닿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고 깊이 공감하는 일이야말로 구원 역사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고양이들이 인간에게 보여준 희망이란, 앞으로 행복한 일만 가득할 것이라는 맹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생의 처연함 속에서 웃고 울던 지난날들이 앞으로 나아갈 우리의 인생에서 결코 헛된 일이 아닐 거라는 믿음의 고백이다.


젤리클 고양이들의 자기 소개처럼 누가 자기의 이야기를 어떻게 듣고 (또는 읽고) 반응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솔직하게 꺼내어놓는 일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용기란 인생의 모호함을 사는 것이 아닐는지.


<캣츠> 오리지널 내한 공연은 서울 (3월 12일까지), 경주, 인천, 대구, 익산, 울산, 청주(4월 30일까지) 투어 공연한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와 네이버 뉴스, 다음 뉴스에도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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