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급 연차 써도 되는거 알지?"
7월, 독일 본사로 보내는 이메일 마다 자동 회신이 돌아 왔다. 지금은 부재중으로 메일 확인이 불가하며, 중요한 일이면 이 사람한테 연락하라는 내용이다. 그거까진 좋다. 문제는 그 비상 연락망 역시 같은 내용의 자동 회신이라는 것. 회사에도 방학이 있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텅 비었다.
상사에게 무슨 일이냐 물으니 독일인들은 아이들 방학 때 맞춰서 7월 한 번, 그리고 크리스마스 기간에 2~3주 가량 휴가를 쓴다고 한다. 문득 한국 오피스에서 근무할 당시, 방문했던 독일 본사 임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첫 임원 발표를 앞두고 긴장에 떨던 신입사원에게 "시작하기 전에 한마디 할게요. 나는 한국 시장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고, 배우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 편한 마음으로 알려줘요." 라는 인사말로 마음을 사르르 녹여주었던 그녀는 미팅 후 저녁에 시간 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점심 회식을 제안했다. 이유는 방학 중인 자식 셋, 그리고 남편과 함께 방문 중이어서. 이 말을 들은 한국팀 사람들은 남편이 집에서 애들 보나봐, 역시 임원은 다르네 라고 말했다.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지구 반대편의 어느 회사원들에게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2~3주의 휴가가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내 이야기를 들은 상사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랬어. 처음 태국 로레알에서 일할 때, 매일 새벽 1시, 2시까지 모니터 앞에 붙어 있으면서 그게 당연한건 줄 알았거든. 프랑스 본사로 옮겨가니까 아니더라고. 다들 회사 밖의 삶도 치열하게 살더라. 심지어 연차가 25일이래. 주말끼고 쓰면 한 1달 반 쯤 회사 안가도 돼. 처음엔 이걸 어떻게 다 쓰나 싶었는데, 그렇게 2년 보내고 독일로 옮겨가서 연차 20일이라는 소리에 짧다 생각이 들더라."
상식적인 휴가에 대한 고찰
독일 본사와 지역 내의 10개 국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부딪히면 매일 느끼는 것,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잊고 살았던 너와 나의 당연함이 참 다르다는 사실이다. 어느 사회의 상식이 누군가에게는 몰상식이다. 휴가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의 상식적인 휴가란 무엇일까. 1. 일이 많지 않은 적당한 시기를 골라, 2. 상사가 그 기간에 휴가를 쓰지 않는지 확인 하고, 3. 너무 길지 않은 적당한 길이로 여행을 떠난다. 조금 더 엄격한 기준을 가진 이들에겐 4. 돌아오는 길에 내가 없는 동안 내 업무를 대신해준 선배 혹은 동료에게 감사 표시를 위한 선물 하나 사는 센스 역시 상식의 범주에 포함 될 것이다.
같은 지역으로 묶여 있지만 우리와 가장 다른 문화권에 있는 호주는 독일과 유사하게 7월에 한 번, 그리고 크리스마스부터 새해에 걸쳐 약 2~3주에 걸쳐 휴가를 떠난다고 한다. 7월에 본사에서 받은 부재중 이메일들 때문에 겪었던 고생을 떠올리며, 1월 중순에 본사 임원 회의에서 승인 받아야 하는 호주 관련 프로젝트 관련하여 12월에 일찌감치 이메일을 보냈다. 1초만에 자동 회신 메일이 돌아왔다. "12월 23일부터 1월 9일까지 이메일 확인이 불가하니 돌아오는 대로 답장할게.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해피 뉴 이어!"
황당함에 웃음이 나왔다. 휴가 기간 동안 동료에게 백업을 부탁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상식이라면, 기다리는 수 밖에.
그 정반대에 있는 것이 과로사 라는 단어를 스시와 나란히 모국어 그대로 영어 사전에 등재시킨 이웃 나라, 일본이다. 그들에게 상식적인 휴가란 동료와 상사에게 폐 끼치지 않기 위하여 쓰지 않는 것이다. 우리 회사의 경우 8월 중 한 주를 지정해 오피스를 닫고, 강제 연차 소진을 한다.
속한 사회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토록 크고, 그 온도 차가 때로는 서글프다.
그리고 나의 휴가
입사 3주 후 하이난 싼야로 주말 여행을 떠나는 나에게 상사는 말했다. "아이린, 여행을 왜 이렇게 짧게가? 연차 없어서 그런거면 무급 연차 써도 되는거 알지?" 진심으로 농담인줄 알았다. 여행을 위한 무급 연차라니.
연차 15일, 그나마도 4일은 회사에서 정부에서 지정한 주말 출근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차감되어 실질적으로 남는 것은 11일 뿐이다. 유럽에서 회사 생활을 길게한 상사와 모국에서의 풍족한 연차가 익숙한 호주인, 독일인 동료들은 중국의 박한 연차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들에게 무급 연차란 2~3주의 장기휴가를 누리기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지 중 하나이며, 상식의 범위 내이다.
이러한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최근에 온라인 코딩 교육 사업을 통해 완벽한 근무지의 자유를 얻어낸 남편과 함께 올해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느끼며 살자 결심했다. 연말 싱가포르 여행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에 대해 고민했고, 새해는 대만에서 동생 결혼 후 사위 둘과 함께하는 가족여행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갈 가족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아프리카다.
모리셔스에서
새파란 하늘에 눈이 부시다. 손에 닿을 듯 낮게 뜬 구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먹구름이 몰려왔다. 새차게 비가 내린 자에 무지개가 떴다. 햇빛이 내려앉는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빛난다. 볼을 스치는 바람이 생생하다. 깜깜한 밤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한참을 바라보니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더 많은 별이 보였다. 별이 쏟아질 것 같아, 하는데 정말 쏟아졌다. 별똥별이다. 손을 꼭 잡고 소원을 빌었다.
오늘도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블라인드를 걷는다. 새파란 하늘에 눈이 부시다. 구름은 오늘도 손에 닿을 듯 빠르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