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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일팔 Jul 05. 2020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게 계획입니다

자꾸만 실패하는 하루에 대하여




퇴근 하자마 집에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나오면 오후 7시. 
7시부터 1시간 동안 빡세게 운동하고 집에 들어가
정말 간단히 먹고 영어공부하면 9시?
가볍게 산책하고 자기 전에 30분 독서! 완벽한 플랜이군.
오늘부터 실행에 옮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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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까지 세웠던, 세우고 있는 계획의 수를 모두 합치면 아마 올해 연도의 숫자만큼은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 10배는 더 많을까? 아무튼 내 컴퓨터 속 문서함 어딘가의 엑셀파일에는 시간대별로 무엇을 할 것인지가 빽빽이 적혀 있고, 그 파일에는 ‘추석연휴계획’, ‘2020년 상반기 계획’, ‘이번 주말 계획’ 등등의 제목이 적혀 있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달력 세 개에도 역시 수많은 과업들, 주말 안에 해야 할 일들, 지금 당장 처리해야 일들,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그런 종이들을 다 모아 쌓아두면 아마 내 키 높이 정도는 될 것이다(그리고 실제로도 나는 이 모든 메모지들을 모아두고 있다!).


하지만 그 ‘과업’ 중 실제 수행되어 완료된 것들은 절반도 못 될 것이다. 어쩔 때는 완료 과업에 빗금을 칠 때의 짜릿한 기분을 더 느끼기 위해 이미 완료한 과업명을 종이 위에 적고 빗금을 친 적도 있다. 이 정도면 계획세우기 중독일까? 문제는 고등학교 여름방학에나 끝났어야 할 이런 유아적인 버릇이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중독처럼 내 삶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즘에도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나이의 십의 자리 숫자가 2에서 3에서 바뀌면서, 지금까지의 삶이 이뤄놓은 것보다는 망쳐놓은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내 삶의 버킷리스트(즉 ‘죽기 전에 꼭 경험해야 할 일’이 아니라 ‘죽기 전에 꼭 완수해야 할 일’의 목록!)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 지난 삶의 파라노마가 참 보잘 것 없다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누구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했고 누구는 100일 동안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누구는 벌써 연봉이 얼마고 누구는 결혼해 애까지 낳았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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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벌이도, 연애도, 인맥도 시원치 않은 나로서는 그들의 화려하고 분주한 삶을 훔쳐보며 내 인생의 성적표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모의고사를 본 뒤의 씁쓸한 심정이랄까. 그러다 보니 그간 못한 일들을 꾸역꾸역 해치워야겠다는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내 앞에 놓인 과업목록에 줄을 더 추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 나이 먹도록 외국어 하나 마스터하지 못했다는 후회는 ‘영어 공부 계획 세우기’로, 여전히 손에 잡히는 군살의 무게감이 불러일으키는 당혹감은 ‘하루 산책 1시간 하기’로, 변변찮은 여행 경험 하나 없이 20여 년 동안 방콕을 한 성실함은 ‘1년에 엄니 모시고 두 번 여행가기’ 등등 따위로 내 과업 목록에, 계획표에, 또 이름 모를 어느 엑셀파일에 알알이 박히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한참 전에 놓친 버스다. 이미 이륙해 창공에 날개를 펴고 있는 비행기다. 철로 위에서 본격적으로 가속력을 붙이기 시작한 열차다. 나는 여전히 정류장에 서 있고 공항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반드시 오게 될 다음 차편을 이용해도 되지만 성난 표정의 도깨비가 방망이를 들고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하듯 잔뜩 겁을 먹은 채 끊임없이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고 엑셀 빈칸에 무언가를 입력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늦으면 안 된다는 조바심에, 남들처럼 살겠다는 찌질한 욕망에 내 삶은 계속해 등을 떠밀린다. “돌격! 앞으로!” 이름 없는 내 자아가 나를 다그친다.


그렇게 다급하게 입안된 계획은, 깊은 사고 없이 마련된 일정은, 충분한 숙고 없이 세운 과업목록은, 당연하게도 금세 무너져 내리고 내 몸은, 내 일상은, 내 의지는 그 가혹한 계획표를 따라가지 못한다. 나는 어제도 저녁에 과식을 했고 오늘 점심에는 영어단어를 외우지 못했으며 내일 아침에는 스트레칭과 푸시업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실패하는 하루의 연속.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하루의 연속. 계획을 모두 지울까 잠시 고민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거기에 적힌 과업목록은 그나마 남은 내 삶의 근간이므로. 내가 이렇게라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한 마지막 남은 희망이므로. 




3


무언가를 꾸준히 반복한다는 건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이렇게 힘든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을 해야 할 사람의 좌절감과 무기력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일주일째 밀린 일기 쓰기, 한 달 동안 쳐다보지도 않고 방치해둔 일본어 문제집, 큰돈을 들여 구입해놓고 빨래 넣어놓는 데 요긴하게 사용 중인 철봉... 한참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과업 목록’과 계획대로 굴러가지 않는 ‘계획표’는 점차 날카로운 가시를 돋우며 제 주인을 향해 달려든다. 어떡하면 좋을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 위태로운 삶을.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딱 하루씩만 계획하며 살기로 했다. 주간 계획, 월간 계획, 분기 계획, 연간 계획 등등의 명칭을 붙인 수많은 ‘계획’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죽어간 역사를 반복하느니, 이제부터는 허울뿐인 계획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오늘 하루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가올 한 주간 무엇을 할지 대강의 일정만 잡아두고, 당장 닥쳐올 다음날의 하루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성공한 하루와 실패한 하루가 모여 한 주를 구성하고 그렇게 다시 한 주가 한 달로, 한 달이 1년이 될 것이다. 설마 고작 하루조차 계획대로 살지 못할까? 


이 위대한 포부의 첫 걸음으로 나는 오늘 집 근처 호수공원에서 달리기를 했다. 대략 9km를 걷고 뛰었다. 바람이 좀 불었지만 괜찮았다. 집에 돌아와 다이어리를 열어 보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새하얀 새 지면이 나를 반긴다. 펜을 들어 ‘호수공원 9km 달리기 완료’라고 적었다. 나는 이제 ‘할 일 목록’ 대신 ‘한 일 목록’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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