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국내 사업인데, 왜 지원한 거죠?"
"지원자가 생각하는 '전략'이 뭡니까?"
"본인의 특기인 외국어는 어떻게 합니까?"
"학습력이 좋은 편입니까?"
"요즘 읽고 있는 책 3권에 대해서 말해보세요"
회사 그룹에 있는 한 상품사업부에서 해외사업을 맡은 지 어언 5년 째였다. 5년 간 크고 작은 조직 변동에서 개인 의사가 반영된 것은 딱 한번, 같은 사업부 안에서 팀 변동을 요청했을 때를 제외하곤(그때에도 의견을 피력하는 과정이 지난했다) 모두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높으신 분들의 의사결정이었고, 그 통보를 고스란히 받아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 회사생활 7년 차 처음으로 회사 내 타 사업부 타 부서에 전배 신청을 했다. 신청하고 면접 보는 단계는 모두 비밀리에 진행됐다.
지원하는 사업부 대표님의 질문들은 모두 "도대체 왜 우리 사업부에서 일하고 싶다는 거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필자의 이전 경력과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었다. 지난 7년 간 필자는 해외사업과 해외 현지 사업관리를 도맡아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국내 사업 전략부문일까. 게다가 현재는 해외사업이 날개를 달고 확장하는 초반이었던 지라, 성과도 집중적으로 빵빵 터지고 있었다. 매일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기에, 이제는 업무를 장악한다는 느낌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고, 더없이 편하고 즐겁고 재밌게 일하던 중이었다.
국내라는 역설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어 해외대학을 졸업했던 것처럼. 해외업무를 맡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해외에 대한 로망은 없어졌다. 미국 유학 간 친구가 '한국이 최고'라는 말을 던질 때도 고개를 백번 끄덕일 수 있던 건 모두 해외사업에 진심을 다해 빠져 들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글로벌 사업을 더 잘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국내 사업 구조를 잘 알아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
기존 사업부는 많이 바빴고, 무엇보다 필자가 매우 사랑하는 업무들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비즈니스 상담 컨설팅을 하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련의 과정이 재밌었다. 타 부서로 간다고 해서 기존 업무를 내팽개치고 나 몰라라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끝나는 마당에 1차 바이어 미팅을 더 많이 어레인지하고 필자가 직접 데모(시연)를 하고 사업부 대표님을 대신해 회의를 이끌었다.
헤어짐의 5단계
기존 사업부 대표님과 개인면담 시간을 잡았다. 하루 동안 총 3번의 면담시간을 갖게 됐다. 처음에는 쿨하게 '결재'를 해주신다고 하셨으나 마지막은 화와 분노로 얼룩지셨다. 한 번도 그렇게 화를 내신 적이 없었는데, 면담이 끝나고 눈물이 주르룩 흘러내렸다. 그날 밤 필자는 대표님과 수년간 일했던 날들이 필름처럼 지나가 밤새 잠을 설쳤다. 편한 길 포기하고 도전하는 건데, 이리 반대하셔서야.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냥 다, 없었던 일로 할까..?'
타 팀의 동료가 헤어짐의 5단계란 걸 보내줬다.
제1 단계는 부정(Denial)의 단계이다.
제2단계는 분노(Anger)이다.
제3단계는 타협(Bargaining)의 단계이다.
제4단계는 깊은 우울증(Depression)의 단계이다.
제5단계는 수용의(acceptance) 단계이다.
그러니까 화내시는 게 부정과 분노의 단계에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필자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으시다 이제는 인사 정도는 받아 주시고 계신다. 인수인계는 '최대한 상세히 체계적으로 하겠습니다.'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꼼꼼하게 업무 팁까지 후임에게 전달하고 있다.
완벽한 타이밍은 없다
기존 사업부 대표님은 현재 해외 사업이 확장 중이니 모두 안정화 단계로 들어설 때까지 6개월 동안 일하다가 그 뒤로도 다른 업무를 원하면 고려해주시겠다고 하셨지만, 그 말이 기약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A 하면 B 할 거야'라는 말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다. 필자 또한 선택지 A와 B가 모두 좋을 때, 장단점이 모두 존재할 때 그래서 그 어떤 것도 선택하기 어려웠던 경우가 이번이었다. 불편하고 어려운 새로운 길을 택했다. 모든 게 준비되는 그런 완벽한 타이밍이 없다는 걸 잘 알았으니까.
너도 떠나보면 알게 될 거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전배 신청부터 성공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셨다는 점이다. 회사 내에서 어떤 자리가 능력을 발휘하고 업무 영역을 확장을 할 수 있는 길인지 알아봐 주시고 연결해주신 타 사업부 타 팀 리더분,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일을 꼭 같이 하고 싶다고 말씀 주신 해당 팀 리더분, 전배 하는 사업부 대표님께 필자를 직접 추천해주신 우리 사업부서의 타 팀 리더분, 그리고 전배 과정에서 중간에서 의견 조율을 해주신 HR팀 리더분, 마지막에 CEO께 의견을 관철시켜주신 전배 하는 사업부 대표님까지. 정말 많은 분들이 계셨다.
"선배님께서 이렇게 추천해주셨으니 부담스러우니까 더 잘해야겠어요."
라는 말에 "지금처럼만 해"라고 하셨다.
이 말이 세상 어떤 말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도전하기 직전까지가 가장 두려운 법이야. 이제 그걸 넘었으니, 지금처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