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 Jun 02. 2023

사막으로

책 읽기 프로젝트 50 #47


외로움을 잊은 신인류


2035년 전 세계 사망률 1위의 원인은 ‘체기능부전증’이다. 공기 중에 퍼진 머리카락의 30분의 1만큼 작은 먼지 형태의 발암물질이 체내로 들어가면서 암, 결핵, 뇌종양, 뇌출혈, 심장병 등 다양한 병으로 변이된다. 엄마는 뇌에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쓰러진 엄마를 병원에 데려갔지만, 가벼운 감기인 줄만 알았다. 여러 번 쓰러지기를 반복하고 다시 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을 때, 엄마의 뇌가 새까맣게 변한 것을 알았다. 수술받은 후 엄마는 모든 것을 잊었다.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갈 수도 없었다.


현재의 행복만을 느끼는 삶.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그 순간만을 사는 삶. 엄마는 마치 신인류 같은 인간이 되었다. p.42


건설 일을 하던 아버지는 늘 한국을 떠나있었다. 가족을 위한 결정이었지만 엄마도 아버지도 외로웠을 것이다.


엄마의 병은 그녀가 살아오며 들이마신 숨의 값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필시 외로움이 끼어들었을 것이다. 물질이 몸속 곳곳에 잘 스며들어 결합할 수 있도록 외로움이 촉매 역할을 했겠지. p.36


병을 더 깊게 만든 것은 외로움이었지만, 그것을 잊게 만든 것도 병 자체였다. 


엄마는 외로움을 잊은 신인류였다. 신인류는 가히 지구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존재였다. p.48


보이는 것과 믿는 것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한국으로 휴가를 나왔을 때, 아버지는 사막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평선에 별이 닿아있는 곳. 아버지는 ‘나’에게 사막에 대해 글을 쓰라고 말한다. 사막을 본 적이 없어 글을 쓸 수 없다고 하자 아버지는 사람은 보는 것을 쓰는 게 아니라 본다고 믿는 것을 쓴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본다고 믿는 것을 쓰는 게 아니라 믿는 것만 본다. 그래서 보는 것만 쓸 수 있다고. p.16


아버지는 결국 봤다고 믿은 것으로 딸의 세상을 바꾸고, 과거도 미래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에게 새로운 추억들을 만들어 준다. ‘나’는 믿는 것을 직접 보기 위해 떠난다.


사막과 외로움


나는 아버지가 말한 사막의 밤하늘보다 그 밤하늘의 별이 우리에게 빛으로 닿을 때까지 얼마만큼 오랜 시간 고독한 우주를 가로질렀는지 따위를 더 생각했다. p.18


사막 밤하늘의 아름다움보다 그 뒤에 있는 외로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결국 ‘나’의 세상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밤하늘의 별이 오랜 시간 고독한 우주를 가로질러 닿은 곳은 결국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다. 그 외로움은 엄마 몸속에 작은 먼지들이 ‘잘 스며들어 결합할 수 있도록’ 촉매 역할을 했고, ‘나’에게 이 땅을 떠나 우주로 가게 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듣고도 한참이 지난 후 실제로 가게 된 사막은 훨씬 포악하고 불친절했다. 모래폭풍으로 별이 지평선에 닿는 건 당연히 볼 수 없었다. 사막에서 만난 숙소 주인은 사막 탐방을 할 수 없게 된 지 아주 오래되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본 적이 없지만 여전히 사막에 대한 아름다움이나 밤하늘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섭고 팍팍한 그곳에서 버티기 위해서. ‘아름다움을 꿈꾸면서 사막으로 외로움을 던진다’고 표현했다.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가는 ‘나’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어느 곳이든 네가 나아가는 곳이 길이고, 길은 늘 외롭단다. 적당히 외로움을 길 밖으로 내던지며 나아가야 한다. 외로움이 적재되면 도로도 쉽게 무너지니까. p.53


‘우주 밖으로 외로움을 내던지면서’, 별이 뜬 사막을 꿈꾸며 그렇게 나아간다.





천선란 작가의 책은 처음이었다. 짧은 단편이지만 책을 덮고 나서도 며칠이나 곱씹어 보았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인 외로움과 사막에 대해서. 평소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은 편인 데다 외로움은 내가 평소 잘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어쩌면 거의 느끼지 못하는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외로움이 소설에서처럼 이렇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감정이라면,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외롭지 않은가. 아니면 그 감정을 그저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사막 같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사막은 원래 모래밖에 없으니까.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외로울 것도 없다고. 하지만 갑자기 몇 년 치 비가 한꺼번에 내리면 아무것도 없던 사막에서 꽃이 피어나기도 하듯이 또 그런 때도 있을 거다.


누군가 전해준 영화<편지>에 나온 대사와 함께 마음속에 오래 남을 책을 만났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자신만이 건너야 할 사막이 있는 것이지. 사막을 건너는 길에 나는 오아시스를 만났다. 한때 절망으로 건너던 그 사막을 나는 이제 사랑으로 건너려 한다. 어린 새털보다 더 보드랍고 더 강한 사랑으로.

영화 <편지> 중
매거진의 이전글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