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도 흐른다 85

공민왕 마지막편 ㅡ 이인임, 최영, 이성계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5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5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10 ㅡ

(공민왕 마지막 편- '이인임', '최영', '이성계')


1374년, 개혁군주 공민왕이 비명에 숨진 후 고려는 혼돈의 깊은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공민왕 죽음은 단지 한 명 왕의 몰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개혁 추동력이 꺾인 순간이었고, 구시대 반동이 되살아나는 신호탄 이기도 했다.


공민왕 죽음과 동시에 고려는 명(明), 원(元) 교체기라는 국제적 격변 속에 내던져졌다.


원 쇠퇴와 명 부상은 고려에 선택 을 강요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철령위' 설치 문제가 있었다.


'철령위'(鐵嶺衛)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동북방 지역인 현재 함경도와 압록강 일대, 즉 '철령(철령산맥 부근)' 지역에 설치된 군사 및 행정 조직이다.


새롭게 솟아오르고 있던 명나라는 자국 영향력을 만주와 한반도북부 까지 확대하려 했고, 이는 곧 고려 주권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이러한 명의 외교적 압박은 고려 내부에서 격렬한 노선을 둘러싼 갈등을 불러왔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강력히 추진한 반면, 이인임은 원나라 잔존세력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 하며 외교적으로는 친명·친원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요동정벌에도 신중하거나 반대 입장을 가졌다.


여기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백성의 삶마저 파괴했다.


홍건적은 두 차례에 걸쳐 개경을 유린하며 국토를 초토화했고, 왜구는 남해안을 따라 끊임없이 출몰하며 고려 해상주권을 위협 했다.


이처럼 고려는 외부침략으로 혼란에 빠졌고, 백성들의 민심도 흩어졌다.


내부적으로는 공민왕이 제거했던 권문세족은 기다렸다는 듯 정계에 복귀한다. 그 선두에 선 인물이 바로 '이인임'이었다.


이인임은 우왕을 옹립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음서, 사적관계로 얽힌 고려 특유 권문세족 정치 복원을 꾀했다.


한편, 이런 위기 외침을 막으며 무장으로 입지를 굳힌 <최영과 이성계>는 새로운 군사실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노선은 달랐다. 명분과 충의를 중시한 '최영', 현실과 실리를 중시한 '이성계'의 간극은 훗날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이라는 결정적 국면에서 맞부딪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은 더 이상 고려 주인이 아니었다.


우왕과 창왕은 실권없는 '인형 왕' 에 불과했다. 이에 고려조정은 더 이상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파벌과 사리사욕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개혁은 좌초되었고, 국정은 무기력 해졌다.


이처럼 공민왕 사후 고려는 안 으로는 반동정치가, 밖으로는 외세위협이 파고든 이중위기 속 에 있었다.


그러나 그 혼돈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한 진통이었다.

최영, 이성계 부상과 '요동정벌', 그리고 '위화도회군'과 마침내 '조선건국'은 모두 이 시기 격랑의 산물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역사는 언제나 기존역사 균열에서 태어난다.

공민왕 사후 고려, 그 균열의 시간은 그렇게 새로운 세계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혼돈의 시대를 대표하는 세 인물인 <이인임, 최영, 이성계>는 저마다 길을 걸으며 고려 미래를 가름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세 사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인임>


'이인임'은 앞 편에서 정리했듯이 공민왕 사후, 가장 먼저 권력을 움켜쥔 인물이다. '명덕태후'와 함께 우왕 즉위를 주도하며 고려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군림한다


이인임은 공민왕 개혁정치에 반동으로 권문세족 복권과 음서 출신 귀족중심 정치를 복원한다.


명원교체기 외교에서 회피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내부 권력 쟁취에만 몰입했다.


이인임은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와 대립했다. 또한 군사실세인 최영과 이성계와 미묘한 힘겨루기를 벌였다.


이인임은 최영, 이성계 두 무장과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대립하며 자신 권력기반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정치적 입지는 흔들렸다.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이인임 세력은 급격히 몰락했다. 그는 결국 권력의 ‘반동’으로만 기억되지만, 한편으로는 개혁이 실패한 후, 정치적 공백을 메운 ‘필연적’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시대는 ‘개혁 뒤 반동’이 얼마나 강력하고 치명적인지를 역사의 교훈으로 남겼다.


이처럼 이인임은 단순한 ‘악인’ 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그는 개혁 으로 무너진 권력구조를 회복 하고자 했고, 그 안에서 생존과 집권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역사는 이인임 몰락을 통해 ‘권력의 덧없음’을 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반동’도 시대 흐름 속 필연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최영>


“가죽은 썩어도 이름은 남는다(皮腐而名不朽).”


한 무장이 죽기 전 남긴 이 말은 고려 말의 무너져 가는 '충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최영'(崔瑩)이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은, 혼돈의 말기 고려에서 최영이 짊어졌던 시대의 무게를 웅변한다.


최영은 군사적 재능도 재능이지만 그 보다도 '청렴함'과 '강직함'으로 후대에 회자된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해라"


요즘도 회자되는 이 유명한 말을 남길만큼 최영은 "큰 벼슬을 했지만 집엔 기와 한 장 남기지 않았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청렴했다.


이러한 말들은 최영의 신화처럼 남았고, "최영장군 묘소에는 풀조차 자라지 않는다"는 전설 까지 생겼다.


최영 또한 권문세족 출신이었지만 온 나라가 권문세족 탐욕에 썩어 갈 때도, 최영은 단 한 점 부귀도 탐하지 않았다.


공민왕 시절, 그는 왜구와 홍건적 물리치며 그 이름을 떨쳤고, 백성 들은 최영을 ‘나라를 지켜주는 방패’라 불렀다. 그러나 최영이 오로지 왕에게만 충직함은 공민왕 사후 점점 정치 회오리에 휘말려 들어 갔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맡긴 개혁은 권문세족에게 철퇴였고, 최영 또한 그 대상자 중 한 명이었다.

최영은 신돈에 의해 잠시 유배를 가기도 하며, 개혁과는 거리를 두었다.


최영은 충군의 정신으로 왕에게만 절대 충성을 지키는 자였다.


이는 최영의 결정적인 한계이자, 비극의 씨앗이었다.


최영은 공민왕 사후, 권력을 장악한 이인임과도 손을 잡는다. 그리고 이성계를 아끼고 챙긴다.


최영과 이성계 나이 차이는 19살 이나 난다. 당시로서는 아들 뻘 이었다. 이성계도 최영을 스승님 처럼 존경하고 따랐다.


최영과 이성계 나이 차를 밝히는 것은 사실 당시로서는 이성계는 최영에 비해 장수로서나 세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영은 명나라가 고려북방에 설치 하려 한 '철령위' 문제에 대해 강경히 맞섰다.


최영은 “그 땅은 고려의 땅이니 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충직하고 애국적인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장악하며 새로운 제국으로 우뚝 섰고, 고려 내부에서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사대부 들이 '친명파'로서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다.


최영은 결국 우왕을 설득해 '요동 정벌'을 강행시켰고, 반대하던 '이성계'를 억지로 출정시켰다. 그러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으로 돌아왔고, 정권은 순식간에 이성계 손에 넘어갔다.


최영은 끝내 붙잡혔고, 한때 아들 같이 여기며 키워주었던 이성계에 의해 처형당했다. 조국을 지키려 했던 무장은 그렇게 낡은 고려 시대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최영의 애국과 충절은 누구를 위한 것이였을까?


보는 눈에 따라 각자 다르게 느끼겠지만, 최영의 당시 행적은 틀리지만은 않았다고 본다.

다만, 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이다.


최영은 충의의 명분은 지켰지만, 당시 세상은 명분으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백성은 굶고, 나라엔 적이 들끓었고, 왕은 꼭두각시였다.


그런 세상에서 최영의 충절은, 오히려 개혁을 가로막는 시대착오 가 되었고, 그가 지키려던 왕도, 나라조차도 최영을 버렸다.


조국을 지키려 했던 늙은 장군은 그렇게 낡은 고려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가죽은 썩었어도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성계>


이성계는 고려 말 주도세력인 권문세가 출신이 아니었다.


함경도 촌넘 출신으로 이성계는 ‘서북변경의 용장’으로 불렸다.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은 혈통은 고려인이었지만 행정구역으로는 고려사람이 아니었다.


이자춘은 '원'으로 부터 '천호'라는 관직을 받고 고려로부터 뺒은 '쌍성총관부'를 지키는 원 소속 관리였다.


쌍성총관부는 1258년에 고려가 함경남도 화주에 설치한 통치기구 였으나 원 간섭기 시절 고려인의 배반으로 원나라 직송령이 되고 만 영토이다.


원에의한 쌍성총관부 통치는 100년간 유지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한 후 원으로부터 주권회복 및 영토회복을 위한 북벌정책 핵심으로 이 쌍성총관부 를 무력으로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하게 된다.


쌍성총관부 탈환은 1356년 (공민왕 5년)에 시작되었다.


이때 원 관리였던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내부에서 고려군과 내통하여 쌍성총관부 성문을 열었다.


쌍성총관부 함락에 공을 세운 이자춘은 고려의 동북병마사가 되어 중앙정계에 진출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성계 나이 스물 살 때였다.


이처럼 고려 권문세가들이 보기엔 당시 이성계는 함경도 변방 촌놈 출신에 불과했다.


그런 이성계가 고려로 전향한 후 수 십년간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무공으로 장수로서 명성을 쌓아 간다.


특히 당시 왜구가 창궐했는데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면서 백성들 새로운 영웅으로 등장 한다.


이성계는 말단 무장으로 시작해, 왜구를 토벌하고, 홍건적을 막아 내며, 이러한 전장을 통해 고려의 주요 무장으로 발돗움하기 시작 한 것이다.


공민왕도 매우 인정했던 이성계 전공은, 단순한 무력만 아니었다. 이성계는 정세를 읽는 눈과 실리 를 중시하는 판단력을 지녔다.


이런 이성계 힘은 단순한 군사력 에서 오지 않았다. 그는 백성의 지지, 신진사대부의 기대,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모두 등에 업고 있었다.


이성계는 이미 ‘군사’가 아닌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를 요구하며 고려에 압박을 가해 왔다. 조정은 분열되었고, 최영은 무력대응으로 '요동정벌'을 주장 했다. 우왕은 최영 제안을 받아 들였고, 출정장수로는 이성계로 낙점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출정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5만 대군이 강을 건너면 백성은 어찌 살며, 적을 이겨도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는 네 가지 명분을 들어 출정을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강을 건너려는 바로 그 순간, 이성계는 결심한다.


"위화도에서 회군하라."


'정도전'이 위화도까지 찾아가 이성계를 설득했다는 설도 있다.

이 이야기들은 후속 편에서 자세히 정리하겠다.


어쨌든 이성계는 '자국 군대의 수도 진군'이라는 쿠데타를 감행한다. 이성계 칼날은 외적이 아니라, 자국 조정을 향해 있었다.


이성계 위화도회군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진 고려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한, 냉정한 정치적 결단 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왕은 무능했고, 최영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으며, 백성은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는 회군 직후 최영을 체포하고, 우왕을 폐위시켰으며, 반대세력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는 곧장 왕좌에 오르지 않았다.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 신진사대부와 함께 ‘새로운 나라’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고려', 무너진 집을 헐어버리고 '조선'이라는 새 집을 짓는 일을 시작했다.


이러한 이성계는 시대 영웅일까?

고려의 배신자일까?


이 질문은 간단하지 않다.


이성계는 어느 한 시대에만 머물 수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고려에서 태어났지만, 조선에 의해 기억되는 인물이다.


이성계 쿠데타는 단순한 반역을 넘어서는 시대적 요청이자 역사의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만 해도 이성계가 꺾은 건 고려가 아니라, 고려라는 이름을 붙인 '타락한 구조' 였을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최영이 명분을 지키며 죽어갔다면,

이성계는 명분을 꺾고 새로운 현실을 열었다.


이성계가 들었던 칼은 반역의 상징이면서도, 동시에 건국의 씨앗이 되었다.


역사는 언제나 결정적 순간에 누군가의 ‘결단’을 기억한다.


이성계는 그 결단의 무게를 견딘 사내였다.


그리고 그 결단이, 고려를 끝내고 조선을 열었다.


이처럼 공민왕 사후 고려는 무너지는 국가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나라가 탄생하는 공간 이었다.


<최영, 이성계, 이인임>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이름 없는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조선은 태어났다.


역사는 그들을 단순히 ‘영웅’ 혹은 ‘반동’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 이었으며, 그 시대를 움직인 ‘힘’ 이었다.


이어서 <조선개국의 시작>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사진


이인임, 최영 추정 초상화

이성계 어진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10 ㅡ

(공민왕 마지막 편- '이인임', '최영', '이성계')


1374년, 개혁군주 공민왕이 비명에 숨진 후 고려는 혼돈의 깊은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공민왕 죽음은 단지 한 명 왕의 몰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개혁 추동력이 꺾인 순간이었고, 구시대 반동이 되살아나는 신호탄 이기도 했다.


공민왕 죽음과 동시에 고려는 명(明), 원(元) 교체기라는 국제적 격변 속에 내던져졌다.


원 쇠퇴와 명 부상은 고려에 선택 을 강요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철령위' 설치 문제가 있었다.


'철령위'(鐵嶺衛)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동북방 지역인 현재 함경도와 압록강 일대, 즉 '철령(철령산맥 부근)' 지역에 설치된 군사 및 행정 조직이다.


새롭게 솟아오르고 있던 명나라는 자국 영향력을 만주와 한반도북부 까지 확대하려 했고, 이는 곧 고려 주권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이러한 명의 외교적 압박은 고려 내부에서 격렬한 노선을 둘러싼 갈등을 불러왔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강력히 추진한 반면, 이인임은 원나라 잔존세력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 하며 외교적으로는 친명·친원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요동정벌에도 신중하거나 반대 입장을 가졌다.


여기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백성의 삶마저 파괴했다.


홍건적은 두 차례에 걸쳐 개경을 유린하며 국토를 초토화했고, 왜구는 남해안을 따라 끊임없이 출몰하며 고려 해상주권을 위협 했다.


이처럼 고려는 외부침략으로 혼란에 빠졌고, 백성들의 민심도 흩어졌다.


내부적으로는 공민왕이 제거했던 권문세족은 기다렸다는 듯 정계에 복귀한다. 그 선두에 선 인물이 바로 '이인임'이었다.


이인임은 우왕을 옹립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음서, 사적관계로 얽힌 고려 특유 권문세족 정치 복원을 꾀했다.


한편, 이런 위기 외침을 막으며 무장으로 입지를 굳힌 <최영과 이성계>는 새로운 군사실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노선은 달랐다. 명분과 충의를 중시한 '최영', 현실과 실리를 중시한 '이성계'의 간극은 훗날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이라는 결정적 국면에서 맞부딪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은 더 이상 고려 주인이 아니었다.


우왕과 창왕은 실권없는 '인형 왕' 에 불과했다. 이에 고려조정은 더 이상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파벌과 사리사욕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개혁은 좌초되었고, 국정은 무기력 해졌다.


이처럼 공민왕 사후 고려는 안 으로는 반동정치가, 밖으로는 외세위협이 파고든 이중위기 속 에 있었다.


그러나 그 혼돈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한 진통이었다.

최영, 이성계 부상과 '요동정벌', 그리고 '위화도회군'과 마침내 '조선건국'은 모두 이 시기 격랑의 산물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역사는 언제나 기존역사 균열에서 태어난다.

공민왕 사후 고려, 그 균열의 시간은 그렇게 새로운 세계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혼돈의 시대를 대표하는 세 인물인 <이인임, 최영, 이성계>는 저마다 길을 걸으며 고려 미래를 가름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세 사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인임>


'이인임'은 앞 편에서 정리했듯이 공민왕 사후, 가장 먼저 권력을 움켜쥔 인물이다. '명덕태후'와 함께 우왕 즉위를 주도하며 고려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군림한다


이인임은 공민왕 개혁정치에 반동으로 권문세족 복권과 음서 출신 귀족중심 정치를 복원한다.


명원교체기 외교에서 회피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내부 권력 쟁취에만 몰입했다.


이인임은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와 대립했다. 또한 군사실세인 최영과 이성계와 미묘한 힘겨루기를 벌였다.


이인임은 최영, 이성계 두 무장과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대립하며 자신 권력기반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정치적 입지는 흔들렸다.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이인임 세력은 급격히 몰락했다. 그는 결국 권력의 ‘반동’으로만 기억되지만, 한편으로는 개혁이 실패한 후, 정치적 공백을 메운 ‘필연적’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시대는 ‘개혁 뒤 반동’이 얼마나 강력하고 치명적인지를 역사의 교훈으로 남겼다.


이처럼 이인임은 단순한 ‘악인’ 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그는 개혁 으로 무너진 권력구조를 회복 하고자 했고, 그 안에서 생존과 집권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역사는 이인임 몰락을 통해 ‘권력의 덧없음’을 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반동’도 시대 흐름 속 필연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최영>


“가죽은 썩어도 이름은 남는다(皮腐而名不朽).”


한 무장이 죽기 전 남긴 이 말은 고려 말의 무너져 가는 '충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최영'(崔瑩)이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은, 혼돈의 말기 고려에서 최영이 짊어졌던 시대의 무게를 웅변한다.


최영은 군사적 재능도 재능이지만 그 보다도 '청렴함'과 '강직함'으로 후대에 회자된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해라"


요즘도 회자되는 이 유명한 말을 남길만큼 최영은 "큰 벼슬을 했지만 집엔 기와 한 장 남기지 않았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청렴했다.


이러한 말들은 최영의 신화처럼 남았고, "최영장군 묘소에는 풀조차 자라지 않는다"는 전설 까지 생겼다.


최영 또한 권문세족 출신이었지만 온 나라가 권문세족 탐욕에 썩어 갈 때도, 최영은 단 한 점 부귀도 탐하지 않았다.


공민왕 시절, 그는 왜구와 홍건적 물리치며 그 이름을 떨쳤고, 백성 들은 최영을 ‘나라를 지켜주는 방패’라 불렀다. 그러나 최영이 오로지 왕에게만 충직함은 공민왕 사후 점점 정치 회오리에 휘말려 들어 갔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맡긴 개혁은 권문세족에게 철퇴였고, 최영 또한 그 대상자 중 한 명이었다.

최영은 신돈에 의해 잠시 유배를 가기도 하며, 개혁과는 거리를 두었다.


최영은 충군의 정신으로 왕에게만 절대 충성을 지키는 자였다.


이는 최영의 결정적인 한계이자, 비극의 씨앗이었다.


최영은 공민왕 사후, 권력을 장악한 이인임과도 손을 잡는다. 그리고 이성계를 아끼고 챙긴다.


최영과 이성계 나이 차이는 19살 이나 난다. 당시로서는 아들 뻘 이었다. 이성계도 최영을 스승님 처럼 존경하고 따랐다.


최영과 이성계 나이 차를 밝히는 것은 사실 당시로서는 이성계는 최영에 비해 장수로서나 세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영은 명나라가 고려북방에 설치 하려 한 '철령위' 문제에 대해 강경히 맞섰다.


최영은 “그 땅은 고려의 땅이니 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충직하고 애국적인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장악하며 새로운 제국으로 우뚝 섰고, 고려 내부에서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사대부 들이 '친명파'로서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다.


최영은 결국 우왕을 설득해 '요동 정벌'을 강행시켰고, 반대하던 '이성계'를 억지로 출정시켰다. 그러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으로 돌아왔고, 정권은 순식간에 이성계 손에 넘어갔다.


최영은 끝내 붙잡혔고, 한때 아들 같이 여기며 키워주었던 이성계에 의해 처형당했다. 조국을 지키려 했던 무장은 그렇게 낡은 고려 시대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최영의 애국과 충절은 누구를 위한 것이였을까?


보는 눈에 따라 각자 다르게 느끼겠지만, 최영의 당시 행적은 틀리지만은 않았다고 본다.

다만, 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이다.


최영은 충의의 명분은 지켰지만, 당시 세상은 명분으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백성은 굶고, 나라엔 적이 들끓었고, 왕은 꼭두각시였다.


그런 세상에서 최영의 충절은, 오히려 개혁을 가로막는 시대착오 가 되었고, 그가 지키려던 왕도, 나라조차도 최영을 버렸다.


조국을 지키려 했던 늙은 장군은 그렇게 낡은 고려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가죽은 썩었어도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성계>


이성계는 고려 말 주도세력인 권문세가 출신이 아니었다.


함경도 촌넘 출신으로 이성계는 ‘서북변경의 용장’으로 불렸다.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은 혈통은 고려인이었지만 행정구역으로는 고려사람이 아니었다.


이자춘은 '원'으로 부터 '천호'라는 관직을 받고 고려로부터 뺒은 '쌍성총관부'를 지키는 원 소속 관리였다.


쌍성총관부는 1258년에 고려가 함경남도 화주에 설치한 통치기구 였으나 원 간섭기 시절 고려인의 배반으로 원나라 직송령이 되고 만 영토이다.


원에의한 쌍성총관부 통치는 100년간 유지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한 후 원으로부터 주권회복 및 영토회복을 위한 북벌정책 핵심으로 이 쌍성총관부 를 무력으로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하게 된다.


쌍성총관부 탈환은 1356년 (공민왕 5년)에 시작되었다.


이때 원 관리였던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내부에서 고려군과 내통하여 쌍성총관부 성문을 열었다.


쌍성총관부 함락에 공을 세운 이자춘은 고려의 동북병마사가 되어 중앙정계에 진출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성계 나이 스물 살 때였다.


이처럼 고려 권문세가들이 보기엔 당시 이성계는 함경도 변방 촌놈 출신에 불과했다.


그런 이성계가 고려로 전향한 후 수 십년간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무공으로 장수로서 명성을 쌓아 간다.


특히 당시 왜구가 창궐했는데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면서 백성들 새로운 영웅으로 등장 한다.


이성계는 말단 무장으로 시작해, 왜구를 토벌하고, 홍건적을 막아 내며, 이러한 전장을 통해 고려의 주요 무장으로 발돗움하기 시작 한 것이다.


공민왕도 매우 인정했던 이성계 전공은, 단순한 무력만 아니었다. 이성계는 정세를 읽는 눈과 실리 를 중시하는 판단력을 지녔다.


이런 이성계 힘은 단순한 군사력 에서 오지 않았다. 그는 백성의 지지, 신진사대부의 기대,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모두 등에 업고 있었다.


이성계는 이미 ‘군사’가 아닌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를 요구하며 고려에 압박을 가해 왔다. 조정은 분열되었고, 최영은 무력대응으로 '요동정벌'을 주장 했다. 우왕은 최영 제안을 받아 들였고, 출정장수로는 이성계로 낙점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출정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5만 대군이 강을 건너면 백성은 어찌 살며, 적을 이겨도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는 네 가지 명분을 들어 출정을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강을 건너려는 바로 그 순간, 이성계는 결심한다.


"위화도에서 회군하라."


'정도전'이 위화도까지 찾아가 이성계를 설득했다는 설도 있다.

이 이야기들은 후속 편에서 자세히 정리하겠다.


어쨌든 이성계는 '자국 군대의 수도 진군'이라는 쿠데타를 감행한다. 이성계 칼날은 외적이 아니라, 자국 조정을 향해 있었다.


이성계 위화도회군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진 고려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한, 냉정한 정치적 결단 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왕은 무능했고, 최영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으며, 백성은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는 회군 직후 최영을 체포하고, 우왕을 폐위시켰으며, 반대세력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는 곧장 왕좌에 오르지 않았다.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 신진사대부와 함께 ‘새로운 나라’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고려', 무너진 집을 헐어버리고 '조선'이라는 새 집을 짓는 일을 시작했다.


이러한 이성계는 시대 영웅일까?

고려의 배신자일까?


이 질문은 간단하지 않다.


이성계는 어느 한 시대에만 머물 수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고려에서 태어났지만, 조선에 의해 기억되는 인물이다.


이성계 쿠데타는 단순한 반역을 넘어서는 시대적 요청이자 역사의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만 해도 이성계가 꺾은 건 고려가 아니라, 고려라는 이름을 붙인 '타락한 구조' 였을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최영이 명분을 지키며 죽어갔다면,

이성계는 명분을 꺾고 새로운 현실을 열었다.


이성계가 들었던 칼은 반역의 상징이면서도, 동시에 건국의 씨앗이 되었다.


역사는 언제나 결정적 순간에 누군가의 ‘결단’을 기억한다.


이성계는 그 결단의 무게를 견딘 사내였다.


그리고 그 결단이, 고려를 끝내고 조선을 열었다.


이처럼 공민왕 사후 고려는 무너지는 국가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나라가 탄생하는 공간 이었다.


<최영, 이성계, 이인임>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이름 없는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조선은 태어났다.


역사는 그들을 단순히 ‘영웅’ 혹은 ‘반동’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 이었으며, 그 시대를 움직인 ‘힘’ 이었다.


이어서 <조선개국의 시작>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사진


이인임, 최영 추정 초상화

이성계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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