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겨울을 묘사한 모던상하이 시대의 작가, 장아이링(张爱玲)
작년 11월에 중국인 제자에게 장아이링(张爱玲) 소설집 경성지련(倾城之恋)을 선물받았다.
320쪽 짜리 책이라 하루에 20페이지씩 읽어 15일이면 다 읽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1시간씩 읽어나갔지만 생소한 30년대식 중문 표현에 진도가 더뎠다. 때론 잡다한 일상때문에 읽기를 건너 뛰는 일도 많다보니 완독에 두 달이나 걸렸다. 그러나 소설은 흡입력이 있었고 때론 충격적이었다.
한국에서 장아이링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가는 아니다. 영화 <색,계(色,戒)>의 작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리안(李安) 감독이 연출한 <색,계>는 여러모로 충격적인 영화였다. 자신이 암살해야 할 친일파와 사랑하게 된다는 논쟁적 서사, 양조위(梁朝伟)라는 대배우에 밀리지 않는 탕웨이라는 신인배우의 연기와 충격적인 베드신, 그리고 이 소설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현재는 어마어마하게 많은‘장미(张迷, 장아이링의 팬을 지칭하는 말)’들이 있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그녀의 작품들은 중국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래전 그녀의 소설 <반생연(半生緣)>이라는 영화가 한국에 개봉한 적 있었는데 그때도 이 작가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그녀가 사망하고 난 후 그녀의 작품이 갑작스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현상을 중국에서는‘장아이링러(张爱玲热, 장아이링 열풍)’라고 부른다. 영화 <색,계> 개봉 후 한국에서도 그녀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몇 권의 소설집과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현재는 대부분 절판중이다.)
대부분의 중국 현대문학 작가들의 작품엔 혁명시대를 거치는 고단한 삶의 그림자가 있다. 소설이든 산문이든 모두 그 그늘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장아이링의 산문에는 그런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색,계>를 제외한 그녀의 소설속에서도 현대중국의 역사적 그늘은 마치 거세된 듯하다.
그녀가 활동했던 당시 중국은 전쟁으로 인해 살기 막막했고 평범한 일상마저 꿈꾸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시대적 분위기에 비추어볼 때 그녀의 글들은 비현실적이고 퇴폐적우로 보인다. 그래서 당대에는 반동이라고 평가되었고 공감조차 얻지 못했다. 지금도 중국의 60, 70세대들은 장아이링의 작품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변하면서 정치적 의도 없이 주로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독특한 작품은 빠링허우(80년대세대), 지우링허우(90년대세대) 세대의 공감을 얻었다. 당당한 활동이 도드라지는 그녀의 작품의 여주인공들은 근대 신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것이 여성의 지위를 향상 시키는데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산문을 읽어보면 특히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장아아링의 소설과 산문 대부분은 30년대 홍콩 및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을 집필했을 당시 그녀는 아직 아름다운 20대의 여성이었고, 귀족 자제였다.(장아이링위 어머니는 청말의 양무운동을 이끈 리홍장의 손녀다.)
30년대 상하이는 서양문명과 동양문화가 조우해 심미적으로 독특한 모던 스타일을 형성했다. 장아이링은 이런 상하이 문화를 만끽하며 살았다. 그런 연유로 그녀의 소설은 바로 30년대 상하이의 문화와 스타일을 그대로 글로 옮겨 놓은 듯 생생하다. 장아이링의 작품이 세속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배경에는 그녀가 국제적인 도시 상하이와 홍콩에서 주로 생활했었다는 사실과 귀족출신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한때 장아이링은 자신을 "황금만능주의자"라고 칭했고, 처음 받은 원고료로 백화점에서 립스틱을 사고, 몸매가 도드라지는 치파오를 입는 등 당시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다른 생활양식을 보였다.
장아이링은 적응하기 힘든 현실과 몰락하는 사회 속에서 우아함과 자존심을 지키려는 귀족 소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행복해보이는 장아이링도 상실과 결핍은 있었다. 아버지의 외도, 어머니와의 이별,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을 겪는다. 이럴게 자신이 지키려는 정체성과 대비되는 불행한 개인사는 세계에 대해 염세적이고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했다. 그녀의 소설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은 이러함 연유에 기인할 것이다.
대표작품들을 살펴보더라도 <색,계>, <심경(心经)>, <젊은시절(年轻的时候)> 등은 자신의 불행한 20대를 면도날로 오려낸 듯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 <심경>은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지만 구성이 독특했고,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가족 간의 대화 속에 담긴 상황들의 빚어내는 비련미가 아프게 다가온다.
모던 상하이의 화려한 조명아래서 자란 장아이링에게 30년대 중국은 화려하지만 덧없고, 사랑하지만 아픈 세계였을 것이다. 그런 심정을 반영하듯 그녀의 소설은 대부분 20대들의 불안, 현기증과 좌절을 그린다. 내면적 고통과 번민하는 모습이 그녀의 소설을 어둡고 병약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막연한 감상으로만 젖어있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매우 비현실적인듯 현실적이며, 비극적이며 쿨(cool)하다. 편견을 가지지 않고 장아이링의 소설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 읽어가다 보면 8살 때 첫 소설을 썼다는 그녀의 문학적 천재성을 자연스럽게 엿볼 수 있다.
인생과 사랑에는 계절이 있다. 인생을 사계절로 표현하듯 사랑도 사계절이 있다.
이별을 예감하는 가을을 거치며 결국 사랑의 겨울을 맞이함은 인생과 같은 순리다. . 오늘날의 로맨스는 불변성과 영원성에 대한 신화로 위장되어 있다. 수많은 드라마와 로맨스 영화가 이 신화를 확산하지만 우리도 사실 그것이 거짓 신화임을 안다. 다만 눈감을 뿐이다.
이 겨울의 끝은 다시 생명이 역동하는 봄이다. 이 겨울에 장아이링 소설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사랑의 생애와 비극, 그 덧없음에 대한 한 인간의 역사를 읽을 수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