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미국으로 가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샌프란시스코는 예외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금문교가 있고 시내의 언덕을 오가는 정겨운 트램이 있는 도시,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시 짬을 내어 100년이 넘은 알록달록한 목조주택이 즐비한 미션 디스트릭트를 거니는 것도 이 도시를 찾는 즐거움이다.
열한 시간의 비행으로 피곤에 절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세관을 무사히 통과하고 입국장으로 들어서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소리를 질러댔다. 꺄아악 오빠~!! 어안이 벙벙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내 뒤를 이어 검은색 마스크와 벙거지 모자를 꾹 눌러쓴 남자 몇 명이 빠르게 지나간다. 커다란 카메라를 손에 든 사람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뭐지? 빅뱅이라도 되는 건가? 이 당시만 해도 내가 아는 남자 아이돌 그룹은 빅뱅이나 2PM 정도였다. 누군데 이렇게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궁금해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한테 물었다. 이 아저씨는 뭐야 라는 표정으로 "방탄소년단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응? 방탄소년단? 뭔가 북조선 인민 공화국의 스멜이 느껴지는데? 무슨 생각으로 아이돌 그룹 이름을 방탄소년단으로 지었을까, 곧 사라지겠구먼 쯧쯧... 하며 집으로 향하는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7년의 어느 날. 회사 동료들과 점심을 먹던 중 방탄소년단 이야기가 나왔다. 한 여자 동료가 방탄소년단 정말 멋지지 않냐고 했고, 옆의 동료가 맞장구를 쳤다. 인터넷에서 방탄소년단이 해외에서 인기가 많다는 기사를 슬쩍 본 적은 있어서 아는 체를 했다.
"방탄소년단이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다면서요?"
"네 엄청 많아요"
"아니 뭐 보니까 노래 좋은 줄도 모르겠고, 왜 인기가 있는 거예요?"
"글쎄요... 음... 칼군무 때문에? 아무튼 멋있잖아요"
이때까지만 해도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그냥 동남아에서 좋아하는 수준이라 생각했다. 다른 아이돌 그룹도 아시아권에서는 인기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궁금해서 공연 영상을 몇 개 찾아보긴 했으나 시끄럽기만 하고 도대체 왜 인기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칼군무가 멋지다고 했으나 이 정도는 다른 아이돌 그룹도 다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또 일 년이 흐른 어느 날. 유튜브에서 우연히 방탄소년단의 신곡 <IDOL> 뮤직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RM의 강렬한 랩이 시작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오 이거 뭐지? 신나는 비트에 국악 장단을 섞은 경쾌한 멜로디, 그리고 화면 가득 펼쳐지는 화려한 영상미에 모니터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사물놀이에서 따온 듯한 춤사위도 신선했다. 방탄소년단이 왜 인기가 있는 지를 실감했다고나 할까. 아이들이 듣기에도 나쁘지 않은 음악인 것 같아서 초등학교 3학년인 딸에게 영상을 보여줬다. 아이는 이게 뭐야? 하면서 시큰둥해했다. 나 역시 <IDOL> 이후에 다른 노래를 굳이 찾아 듣지는 않았지만 방탄소년단이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2019년의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오니 아이가 아이패드로 뭘 열심히 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슬쩍 들여다보니, <IDOL> 뮤직 비디오였다.
"BTS에 이제 관심이 생겼어?"
"응 아빠, 방탄 정말 멋있어"
"아빠, 이 사람 이름이 뭔지 알아?"
"응? 글쎄, 다들 비슷하게 생겨서..."
아이는 그 뒤로 틈 날 때마다 방탄 멤버들의 닉네임과 이름을 계속 물어보았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아빠를 마구 놀려댔다. 사실 처음에는 누가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내 눈에는 일곱 명이 다 똑같아 보였다. 아, RM은 빼고 6명이 그랬다. RM 김남준은 워낙 인상적으로 생긴 데다가 목소리도 독특해서 <IDOL> 뮤직비디오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얼굴을 구분할 수 있었다. 안면인식 장애가 있는 나는 아이의 지속적인 괴롭힘에도 몇 개월이 지난 후에야 나머지 여섯 멤버들 - 그러니까 진 김석진, 슈가 민윤기, 제이홉 정호석, 지민 박지민, 뷔 김태형, 정국 전정국 이렇게 여섯 명 - 의 이름과 닉네임을 외우고 그에 따른 얼굴과 역할을 매치시킬 수 있게 되었다.
혹시나 아직도 방탄소년단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뒷줄 왼쪽부터, 래퍼 제이홉, 보컬 정국, 래퍼 RM, 보컬 진, 래퍼 슈가, 보컬 뷔, 보컬 지민.
제이홉은 메인 댄서이면서 서브 래퍼 역할을 맡고 있고 항상 웃는 해피보이이다. 정국은 팀의 막내이자 메인보컬, 서브 래퍼를 맡고 있고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를 자랑한다. RM은 팀의 리더이면서 메인 래퍼인데, 미드 <프렌즈>를 보고 배운 영어가 네이티브급이다. 자칭 타칭 월드와이드 핸섬 진은 팀의 맏형이면서 서브보컬을 담당하고 있다. 리드 래퍼인 슈가는 독특한 랩을 구사하는데 작년에 <대취타>라는 솔로곡으로 전 세계를 강타한 바 있다. 귀여운 외모와 달리 굵은 저음이 매력적인 뷔는 배우로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고, 서브보컬 역할이다. 어릴 적부터 무용을 했던 지민은 메인 댄서이자 리드보컬을 맡고 있다.
내가 BTS를 좋아한다 하고 아미를 자처하면, 사람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다 늙어서 웬 아이돌, 그것도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냐고 타박을 한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저녁마다 방탄소년단 노래를 들으며 소일거리를 하고, 당근 마켓을 뒤져 어렵사리 아미 밤(BTS 응원할 때 사용하는 응원봉)을 구하고, 강남역을 지날 때면 라인 프렌즈 샵에 들려서 BT21(방탄소년단 캐릭터) 인형을 사서 아이에게 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BTS 온라인 라이브 콘서트를 할 때마다 내가 나서서 표를 구입하여 아이와 관람하고는 한다.
급기야 지난 10월에는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주식을 사기도 했다. 용돈을 모아 공모주 청약을 시도하였으나, 너무 뜨거운 열기로 인해 실패했다. 증거금 1억을 넣어야 2주를 받을 수 있게 되어서 턱도 없는 금액을 넣은 나는 자동 탈락이었다. 상장 당일이 되자 갑자기 주식 가격이 치솟았다. 지켜보던 나는 몸이 달은 나머지 따상(청약가 13만 5천 원의 따블에 가격 제한 상한가인 +30%까지 상승하는 것 = 35만 1천 원) 부근에서 매수를 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 너무 비싸져서 주식을 사지 못할까 겁이 나서 팬심으로 사 버렸다. 주식 가격은 내가 산 직후 수직 하강해서 지금은 15만 원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그렇다. 말 그대로 주식이 반토막이 났다.
BTS와 나는 크게 네 번의 인연이 있다. 공항에서 슬쩍 보았을 때, 동료들이 BTS를 칭송할 때, <IDOL>을 처음 듣던 날, 그리고 빅히트 주식을 구매했을 때이다. 피천득 선생은 당신의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와의 만남 중 세 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BTS와 네 번째의 인연은 맺지 말았어야 했다. 빅히트 주식 환불을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 청원에 한 숟가락 보태러 가야겠다.
*cover image from ibighi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