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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마담 Nov 21. 2019

베토벤의 비창과 월광, 그리고 열정

<김선욱 피아노 리사이틀>

피아노 리사이틀은 처음입니다. 아는 곡이 별로 없고, 자주 듣는 곡이 많지 않죠. 그럼에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2악장은 유독 좋아합니다. 또한, 14번 '월광' 피아노 소나타의 1악장도 오다가다 들었는지 익숙해서 이끌렸어요. 두 곡의 템포가 '아다지오' 인걸 보면 느린 곡이 땡기나 봐요.


피아니스트 김선욱씨가 '비창'과 '월광' 소나타를 연주한다는 소식을 봤어요. 더하여 베토벤의 '열정'까지 유명한 곡들로 프로그램이 구성됐더군요. 마치 저를 위한 것처럼. 망설임없이 바로 예매 했습니다. 그나마 알고 있는 피아노 연주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시간을 어찌 놓치겠습니까.


세 곡의 음원을 구해 시간나는 틈틈이 들었습니다. 악장 하나를 들어도 좋지만, 전체 악장을 들으면 왠지 더 이해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지난 연주(말러 교향곡 3번)의 감명이 남아 있는 롯데 콘서트홀에 들어서자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고독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그 악기가 가슴에 어떻게 파고들지 기대감으로 들떴어요.



[잠깐!] https://classicmanager.com/playlist/115622 
위 혹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클래식 매니저'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브런치에서 바로 연결이 될텐데, 우측 하단 '박스 화살표'를 클릭하시고 웹브라우저로 실행 혹은 상단에서 '클래식매니저 전용앱'으로 실행하면 음악을 들으며 리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침착해보이는 김선욱씨는 피아노 앞에 앉자 망설임없이 건반을 정복해갔습니다. 의외였어요. 보통 연주자들은 집중하기 위해 잠깐 틈을 갖던데, 자신감이 느껴졌습니다. 바흐의 <토키타, 아다지오와 푸가 C장조, BWV564>는 앞으로 나올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의 intro 처럼 느껴졌어요.


베토벤 초기 걸작으로 손꼽히는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Op.13은 '비창'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선욱씨가 특유의 화음으로 시작하여 Grave(엄숙하고 무겁게 혹은 장중하고 느리게) 서주를 손으로 짚어내는 데 심장이 두근 거렸어요. 그의 손은 거침없이 베토벤의 음표를 자신이 해석한대로 타건해나갔습니다.


'비창' 1악장 주요 주제가 시작되자 불안하게 깔렸던 긴장이 증폭됐어요. '그의 악보까지 미리 공부해 놓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미치자 벌써 다른 주제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서주의 멜로디가 혹은 그 분위기로 돌아갔다가 트레몰로의 긴장으로 끝났습니다.





긴장을 녹이는 2악장이 시작되자, '어디가 주제지?', '조성이 바꼈나?', '어디가 멜로디?' 머리로 생각하는 음악에 한계를 느꼈어요. '모르겠다. 그냥 듣자' 싶으니 가슴으로 밀려 옵니다. 진한 여운이 감도는 여음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3악장의 론도 알레그로의 익숙하고 흥겨운 리듬과 멜로디에 시린 감정이 날라갔어요.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세 곡의 또 다른 공통점은 시작하자마자 듣는 이를 음악 속으로 훔쳐버린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14번 C# 단조 Op.27/2 '월광'으로 친숙한 곡 역시 1악장부터 처연한 달빛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연주 후 어느 사이트에 올린 김선욱씨의 해설은 일품이었죠. 아마 평론가 최은규씨가 연합뉴스에 올린 비평을 읽고 썼던 거 같습니다. '월광'이라는 부제가 붙은 건 베토벤이 1801년 작곡한 후 31년이나 지난 다음에 붙여졌는데, 달빛에 비유되는 해석대로 연주하고 싶은 마음은 0.1%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소신에 감탄했습니다


또한 평론가의 의견도 존중해요. 건강하게 의견을 나누면 좋은 연주와 관람문화를 성숙시킬테니까. 베토벤은 이 곡에 '환상곡풍 소나타'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개인 취향에 의해 '호수에 비친 달빛'으로 느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듯 해요. 어느 하나의 느낌으로만 이해되는 건 아깝지 않을까요? 


이번 연주회 가장 기대했던 건 '열정'으로 불리는 '23번' 소나타의 3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주회 관람 후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건 '14번' 월광의 3악장이었죠. 23번 열정 소나타는 이 곡의 연장선에 있는 거 같아요. 열정이 용솟는 느낌이랄까요? 으르렁 거릴 정도의 속주는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이 에너지가 낭만주의를 열어가는 원동력이 됐을 겁니다. 고전적 소나타와 거리를 두고 낭만적 표현이 실험되는 작품이죠. 제목부터 그 느낌이 강하죠? 23번 F단조 Op.57 '열정'이 틈새를 아예 찢어버리듯 연주회 피날레를 열었습니다. 앞에 들었던 '비창'과 '월광'과는 확연히 구변되는 연주였어요.





앞선 두 곡에서 보여지던 규칙이 없어진 듯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다지오의 서정과 알레그로의 격분을 왔다갔다 하는 느낌의 1악장은 중반부에 나오는 지속음의 변화가 주는 긴장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현란한 연주는 말할 것도 없었죠. 가장 기대한 3악장은 2악장의 안단테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제가 말이죠.


아침부터 여러 일정을 소화했던 몸에 한계가 왔어요. 3악장으로 넘어가는 걸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몽롱하게 들렸어요. 체력이 아쉬웠죠. 중요한 순간에 밀려든 졸음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긴장 넘치는 음악이 앞에서 현란하게 연주되어도 어찌 잠이 그리 쏟아지던지요.


억지로 눈은 떴지만 정신은 베토벤의 음악과 김선욱씨 연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역시 기대하는 공연 전날에는 푹 쉬는 게 좋네요. 베토벤이 그의 음악에 숨겨놓았다는 유머는 이런 순간의 시크한 웃음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관람정보> 
1. 관람일 : 2017년 3월 18일
2. 공연명 : 김선욱 피아노 리사이틀 베토벤
3. 프로그램
 1) 바흐-부조니(편곡) 토카타, 아다지오와 푸가 C장조, BWV564
 2)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3)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4)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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