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세상 1 : SHUDO
이 글은 다음 애니메이션에 대한 글이다.
애니메이션은 시체가 곳곳에 놓인 눈밭에서 사무라이가 한 남자를 죽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긴 머리의 사무라이는 일본식 변발(촌마게)을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둘은 흠칫 놀라면서도 칼을 다잡는다. 자세히 보면 두 남자의 옷에는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다. 서로를 죽여야 할 운명인 것이다. 칼이 부딪치면서 그들이 사이좋게 무술 연습을 하던 과거가 오버랩된다.
화면은 다시 눈밭으로 돌아와 두 무사는 서로의 목을 노린다. 변발머리 무사가 장발 무사의 목을 조르는 찰나, 다시 과거로 돌아가 두 무사가 함께 목욕을 하다가 안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변발머리 무사가 긴머리 무사의 목을 쓰다듬는 모습은 둘 사이의 성적인 행위를 암시한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이 다시 눈밭으로 돌아와 이젠 긴머리 무사의 목을 조인다. 발버둥 치던 긴머리 무사는 결국 목이 졸려 죽고 변발 무사는 고개를 떨군다.
예전에 친구였던(그리고 성적인 관계가 있었던) 두 남자가 적으로 만난,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는 제목으로부터 이 둘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제목은 SHUDO. 일본어로 衆道. 슈도(しゅどう) 라고 읽는다.
슈도, 사무라이의 사랑
슈도. "어린 소년의 길" 을 뜻하는 와카슈도(若衆道)를 줄여 부르는 말로, 남색(男色)과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슈도는 어른 사무라이와 소년 사무라이의 동성애를 뜻한다. 16~18세기의 전국시대와 에도막부 시대에 성행했으며, 어른 사무라이는 nenja(念者), 소년 사무라이는 wakasu(若衆)라고 불렸다. 슈도는 에도 막부시대에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일본은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불교, 도교, 유교문화를 모두 전해받은 국가다. (물론 이 세 종교는 모두 동성애를 일부 용인하기도 했지만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지는 못했다) 이런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슈도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까?
남성 동성애를 인정한 일본 불교
책 <Male Colors: The Construction of Homosexuality in Tokugawa Japan> 에 따르면, 9세기경 일본에서는 남자들이 강제노역을 피하기 위해 불교의 수도승이 되는 것이 유행이었다.
중세 시대(1185-1572)에 90,000개의 불교시설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 적지 않은 사원이 약 1000명씩의 남자와 아이들을 수용했다. 히에이산에 있는 시설은 3000명의 인원을 수용했는데, 이들 중 많은 수는 산에서 12년동안 머물러야 했다. <Male Colors>
오랜 기간 남자를 많이 수용하게 된 불교시설에서는 동성애가 흔해졌다.
13세기 부터는 동성애가 공개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예술과 문학에 나타났다. 17세기 일본의 유명한 극작가 Chikamatsu Monzaemun가 불교 사원이 있는 고야산에 대해 쓴 극의 한 대목을 보자.
On Koya the mountain
Where women are hated
Why does the maiden-pine grow?
Yet even if the maiden-pines were all rooted out,
Would not the stars of love
Still shoot through the night?
"고야산에는 여자가 없지만 사랑은 여전히 존재한다" 동성애에 대한 암시다. 이처럼 일본 불교의 동성애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었던 건 일본이 대륙으로부터 분리된 섬나라였고, 9세기에는 중국과의 정기적인 교류를 중단한 덕에 중국 불교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일본의 토착신앙인 신토(神道)에서도 동성애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에도막부 시대의 작가 Ihara Saikaku는 신들이 남성 동성애관계를 선호했다고 빈정댔다. 8세기 신토 신화에서 세 세대동안(for three generations) 여성 신은 없었고, 그는 이것이 shudo의 역사적인 기원이라고 주장했다. <Male Colors>
슈도의 본질은 동성애가 아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불교문화를 일부 계승했고 동성애 문화 역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슈도의 본질은 동성애가 아니라 '사무라이 도제교육'이었다. 어른 사무라이가 소년 사무라이에게 무사의 가치와 생활양식을 가르치는 것이 슈도의 핵심이었기애 두 사무라이는 감정적으로도 매우 친밀했다. 세력다툼이 활발했던 전국시대부터 사무라이들은 영역을 지키고 반란을 막기 위해 새로운 사무라이를 육성해야했다. 남자가 여자보다 많은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초기 일본 불교사원처럼 남성의 수가 월등히 많은 상황에 당시 사회의 동성애 문화가 결합되며 일본의 고유한 슈도문화가 형성되었다.
슈도는 서로에게 고귀한 관계였다. 그들은 봉건적 의무를 함께 하며 전투나 복수와 같은 명예를 건 임무를 함께 했다. 남자아이가 크면서 성적인 관계는 유지되지 않아도 그들의 관계는, 이상적으로는, 평생토록 우정으로 유지되었다. <Cartographies of desire: male–male sexuality in Japanese discourse>
슈도는 정열적인 사랑보다는 의형제 혹은 사제관계에 더 가까웠다. 둘의 관계는 수직적이었고, 어른 사무라이는 소년을 사무라이로 키워냈다.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스승을 섬기는 일에 가까웠으며 긍정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소년 사무라이가 나이가 들면 성적인 관계는 옅어지고 여자를 찾아 결혼을 했다. 그러나 소년시절에 맺었던 슈도의 관계는 평생동안 의형제의 형태로 유지됐다. 그리고 소년은 어른 사무라이가 되어 새로운 슈도관계를 맺었다.
슈도 문화는 에도막부시대를 끝낸 메이지 시대로 접어들며 서서히 쇠퇴하다가 서양의 기독교문화가 들어오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와서
2분짜리 짧은 애니메이션. 그중에서 내용은 약 1분 30초인데 짧은 시간에 슈도관계였던 두 사무라이의 과거와 감정을 잘 표현했다. 개인적으로는 영상의 화면전환방식도 맘에 드는데, 두 무사에게 휘몰아치는 하얀 눈폭풍이 과거 목욕탕의 하얀 수증기로 바뀌는 장면이 기발하다고 느껴져 몇 번을 돌려봤다. 역사적인 고증도 찾아볼 수 있는데, 슈도를 묘사한 당시의 그림을 보면 어른 사무라이는 변발을, 소년 사무라이는 긴 머리를 하고있다. 애니메이션은 이를 충실하게 재현했다. 긴머리 무사를 죽인 변발 무사는 고개를 떨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고자료
<Male Colors: The Construction of Homosexuality in Tokugawa Japan> By Gary Leupp
<WAKASHUDO, THE "WAY OF THE YOU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