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너같은 딸 낳아서 키워라!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믿지 않겠지만, 어릴적 나는 꽤나 엄마의 골칫덩어리였다. 참새가 날아가는 모양이며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는 방향을 구경하며 걷다가 넘어지기는 일쑤였고 모르는 아주머니한테 냅다 똥침을 날린 적도 있어서 엄마는 매일같이 사고뭉치를 잠재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사실, 네 살 먹은 아이가 넘어지거나 놀이공원에서 모르는 아주머니를 엄마로 착각하고 엉덩이를 찌르는 실례를 저지른다고 해서 큰 일이 생기진 않을거다. 하지만 내겐 그보다 더 근본적인 위험 요소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척수 반사"도 아닌 "손가락 반사"라는 생체 반사작용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처음 보는 것이라면 뭐든 손가락으로 쿡 찔러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는 말이다.
이 반사작용은 호기심과 결합하면 굉장한 위력을 발휘하는데, <오븐은 뜨거우니까 만지지마라>는 <거 오븐이 얼마나 뜨끈한지 한번 만져볼까?>로 해석되고, <자동차 창문으로 손 내밀지 마라>는 경고는 <씽씽 부는 바람을 손가락 사이로 느껴보지 않을래?>라는 유혹이 된다. 그렇게 자동차 트렁크에 손가락이 끼이는 등 다양한 수난을 겪던 내 손은, 어느 날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난간 밖으로 팔을 내밀다가 크게 다칠뻔해서 내 등짝이 엄마손과 매우 친밀해진 사건을 계기로 호기심과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이별에 질척이는 연인들처럼 "손가락이 먼저다" 라는 슬로건은 어디 가지 않았고, 지금도 나는 새로운 것이라면 뭐든 제일 먼저 손으로 만져보곤 한다. 다른 감각과는 달리 무언가를 만질 때면 마음이 차분해지는게 두뇌의 어떤 화학적 작용 때문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사람의 얼굴과 말소리야 아침 뉴스부터 시작해서 하루종일 지치도록 보고 들어 저녁쯤 되면 도망치고 싶어지는데 촉각은 종종 짜증나는 상황에서도 되려 안도감을 준다. 출근길 만원버스는 경이로움의 대상이다. 어떻게 그 작은 버스에 저 많은 사람이 다 실리는지! 꽈악꽈악 눌러타니 짜증도 울컥울컥 올라오는데 가끔은 후끈한 버스 안 공기와 피부로 느껴지는 뒷사람의 온도에 묘하게 안도감과 반가움이 들 때가 있다. 생명체만이 내뱉는 온기가 느껴져서 그런걸까. 그런 날이면 출근길 내내 멍하게,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상상해본다. 때론 사귀자는 말 한마디보다 슬며시 잡는 손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오래된 절에 가면 목재를 찬찬히 만져본다. 몇 백 년 전 누군가는 풍년을 기원하며, 수십년 전 누군가는 전쟁이 끝나기를 기원하며, 어제의 누군가는 자식의 수능대박을 기원하며 절의 나무를 만졌을테지. 나무를 키운 햇살의 온도가 느껴지는 듯도 싶다. 그렇게 목재의 단단한 질감과 결을 가만가만 짚어보다가 나도 작은 소원을 하나 불어넣고 돌아선다.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던 어릴적부터 촉감으로 책에 대한 첫인상이 결정되는 지금까지 돌아보건대, 어쩌면 촉각은 내가 세상과 연결되는 동시에 살아있음을 음미하는 일차적인 행복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극세사 이불이나 강아지, 고양이처럼 따뜻하고 보들보들한 걸 좋아하고, 그렇게 보이는 것-예를 들면 곰 세마리가 나오는 애니메이션-들도 좋아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 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일이고 말이다. 지금껏 갖고 있는 호기심, 상상력, 감수성도 촉각 덕분일지도. 엄마에겐 좀 미안하지만 어릴적 나의 겁없던 행동들이 다행스럽다. 물론, 먼 미래에 태어날 내 아이는 이러진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칫하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라고 말한다면 엄마는 이렇게 말하겠지. "꼭 너같은 딸 낳아서 키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