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10일까지 기획전…‘Her zoo’ 주제로 개인전 준비
소설가로 많은 화제작을 썼던 정영희 작가가 화가로 데해 화제다. 정 작가는 지난달 28일부터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뮤지엄 테라피 : ’Chill Your Soul’전에 작품을 내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미대 출신인 정 작가가 40여 년 만에 ‘본업’을 되찾은 것이다.
정 작가는 대구 영남대 미대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대 2학년 재학 중 전국대학생 소설 모집에 단편소설 ‘아내에게 들킨 생’이 당선되면서 40여 년간 소설가로 활동했다. 그간 장편소설 5권, 작품집 2권, 산문집 3권과 여러 공저가 있는 전업 작가로 문단 활동을 왕성하게 해온 중견 작가다.
정 작가에 따르면 3년 전부터 그림에 대한 그리움이 터져 나오면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정 작가는 “더 이상 구할 것이 없고, 하고 싶은 것이 없어 세상과 인연이 모두 끝났다 싶은 지점에서 색이 내게 다가왔다”며 “속에서부터 울컥울컥 터져 나오는 그림에 대한 그리움의 깊이가 이리 깊은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눈먼 사막여우, 철새 떼, 백상어 떼 등 연작은 그림에 대한 갈망을 담은 페르소나다. 붓 대신 펜을 선택했지만 그는 쉼 없이 갤러리를 오가며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 수집과 현장 학습으로 안목을 키워나갔다. 탄탄한 이론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그의 작품은 자연으로의 회귀라는 큰 주제를 품고 서서히 다듬어졌다.
정 작가 그림은 그만의 색다른 특징이 몇 가지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늘 동물과 식물이 어우러져 등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각 동물의 특징을 살려 간결하게 캐릭터화 한 기법은 작가의 높은 미적 감각을 드러낸다. 이 같은 능력은 정 작가가 세계적 화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강력한 콘텐츠가 될 전망이다. 바오바브나무, 사과나무를 비롯해 매화, 불로초, 능소화 등 식물은 작품마다 제각기 속뜻을 품은 숨은 기제로 작용한다.
그의 작품은 동화적이고 우화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의인화된 동물들을 통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초상을 주로 다뤘다. 특히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오마주 한 작품들은 ‘이 행성은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별에 왔는가’, ‘어디로 기야 하나’와 같은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몽환적이고 특정 방향을 향하는 동물들의 시선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작가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길 가다가 주워 온 골판지를 잘라 도화지로 사용하는 것도 독특한 회화적 특징이다. 투박하게 드러나는 골판지의 우둘투둘한 질감은 척박한 현대사회의 투영이다. 크레파스, 오일파스텔, 아크릴물감 등 혼합 재료를 사용해 거칠고 때론 아득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도 정 작가 작품의 특징 중 하나다. 소설가 출신답게 그림을 표현하는 한 줄 제목과 각주처럼 달아 놓은 간결한 설명은 그림을 보는 또 하나의 감상 포인트다.
정 작가의 롤 모델은 미국 작가 알렉스 카츠다. 인물초상과 풍경을 주로 그리는 카츠는 90대지만 여전히 현역이다. 또 한 명은 90대 일본 작가 쿠사마 야요이다. 전위예술가인 야요이는 설치미술 작품인 호박이 유명하다. 60대의 정 작가는 이들보다 30살 가까이 젊다. 이들 거장들에 대한 오마주는 늦게 시작한 만큼 오래도록 작품을 하면서 세계적 화가가 되고 싶단 의지가 담겨있다.
정 작가는 앞으로 더 많은 동물을 지면에 등장시켜 자신만의 동물원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음번 개인전 주제는 ‘Her zoo’로 정했다. 개인전을 기점으로 세계무대 진출도 서두르고 있다. 정 작가는 “나의 동물원에는 의인화된 동물들의 사랑과 기쁨, 이별과 슬픔이 아라비안나이트처럼 펼쳐질 예정”이라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통해 유한한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첫 전시를 예술의전당에서 연 것도 화제지만 무려 60여 점을 출품해 전체 전시회를 주도하고 있다는 평이 나온다. 작품도 대부분 판매되는 등 데뷔전부터 컬렉터 취향을 저격했다. 한편 이번 전시는 정 작가를 비롯해 최영옥, 최소리, 유가연, 이이남, 권용래, 미미, 정재원 등 쟁쟁한 작가들이 회화, 설치, 디지털아트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고 있다.
미술전문지 데일리아트 한이수 대표는 “정영희 작가 작품을 보고 있으면 수구초심과 함께 가슴 한쪽이 뜻 없이 저릿한 느낌을 받는다”면서 “문학적 기반 위에 그려진 그의 작품은 보이는 게 아니라 마치 텍스트처럼 읽히는 매력이 있다”고 평했다.
20년간 인연을 이어 온 유성호 문화평론가는 “40여 년간 펜을 잡았지만 붓을 놓지 않은 저력과 흔적이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포근한 그림 이면에 치열했던 작가 인생사가 담겨 있는 듯해 묵직하게 여운이 남는다”고 감상평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