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갇힌 우리
스무 살 이후의 삶-1
Your culture maintains an implict "schedule" for the right time to do many important things.
우리는 시간 안에 갇혀 살아간다. 우리를 가두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부유한 사람이던 가난한 사람이던, 착한 사람이던 나쁜 사람이던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듯 시간은 도도하게 세상과 독립적으로 그저 흘러가기만 한다. 그러나 도도한 시간은 종종 매서운 심판자의 역할을 한다. 흐르는 시간 안에서 필요한 경험을 하지 못한 존재를 세상에 뒤처진 존재로 규정짓는다. 심지어 '먹고사니즘'에 입각한 경쟁을 하지 않은 존재를 낙오자로 내리찍어 궁핍하게 만들기도 한다.
서두에 제시한 영어문장은 수능을 주관하는 교육과정 평가원 모의고사 첫 문장이다. 해석하자면 '당신이 해야 할 많은 중요한 일들의 시기는 당신의 문화가 결정한다'이다. 이 지문에서는 우리들의 일상의 삶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지문은 우리의 문화가 연애를 해야 할 시기, 대학을 졸업할 시기, 집을 사야 할 시기, 아이를 가져야 할 시기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문화를 'Social Clock'이라 부른다.
지문은 덧붙인다. Social Clock은 사회에 보이지 않는 시간표로 우리를 앞서거나 뒤 쫓아온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표(Social Clock) 속에서 또래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왜냐하면 뒤쳐진다면 사회생활에 적합하지 않고 능력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뒤쳐진 이는 사회에 불만을 느끼고 또래집단에 소속되지 못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지문에서는 어떤 사회는 Sociak Clock에 유연하며 일탈에 관용을 베풀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Social Clock은 여전히 또래들과 비슷한 행동을 하도록 압력을 가한다고 주장한다.
애석하게 위 지문을 읽고 있을 때(2012년 9월 모의고사) 나는 대입 삼수생이었다. 또래집단에 속했던 고등학교 동창들은 대학생활의 절반인 네 번째 학기를 다니거나 병역의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재수종합반을 중간에 나와 독서실에서 홀로 고통받고 있었다. 9월 모의고사조차 시험장에서 보지 못하고 두 평짜리 독서실에서 프린트해서 풀었다. 외로웠던 모의고사의 40번 문제 Social Clock에 관한 지문의 답은 1번. Social Clock: An Unavoidable Pressure이다. 평가원은 사회적 시계의 압력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의고사를 통해 삼수생에게 상기시켜주었다.
너무나도 거대한. 너무나도 작은.
2016년 3월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총인구는 약 74억 명에 달한다. 또한 하루에 약 35만 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약 15만 명의 인간이 숨을 거둔다. 어마어마한 수치다. 게다가 지구라는 계로 세상을 바라보면 인구수만이 어마어마한 것이 아니다. 역사와 넓이도 어마어마하다. 지구의 역사는 대략 46억 년이 넘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토지의 넓이도 5.1억㎢이 넘는다. 이렇게 어마 무시한 세상에서 인간은 100년도 못 되는 시한부 인생을 산다. 결론이 정해진 삶(죽음)에서 100㎡의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 오늘도 자기 착취를 한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거대한 세상에서 너무나도 작은 개인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할까?
나는 자그마한 자신을 무지막지한 세상에 위치시키는 과정이 성장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에는 가족의 품과 동네 골목이 세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세상의 파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한다. 또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느낀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배워 나간다. 그래서 내가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성장은 소망을 하나씩 지워가는 냉혹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원대한 꿈과 낭만적인 열정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세상은 장애물 투성이다. 개인은 사회적 시계가 요구하는 조건을 만족시키느라 정형화된다. 가끔은 스스로를 잃어가는 느낌도 든다. 나이를 먹을 수록 하고 싶은 것은 많아지는데 할 수 없는 것은 늘어난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 개인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도전할지, 안주할지, 유보할지.
이 상황에서 혹자는 도전의 가치를 설파할 수도 있다. 도전 참 좋다. 하지만 사회는 도전에 성공한 이에게는 찬사를 보내지만 실패한 이에게는 뼛속까지 차갑다. 세상은 시작하는 이에게 도전을 장려하지만 실패한 이는 방치해 버린다. 이 현실 속에서 도전은 개인에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 딜레마를 조금 더 냉소적으로 바라보자. 몇 살 땐 무슨 경험을 하고 무슨 스펙을 쌓아야 한다. 언제까지는 직장을 잡고 어느 정도 돈을 모아야 한다. 이 같은 당위가 하나 둘 쌓이는 사회. 사회적 시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초고가 정해진 소설 속 주인공이다.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는 세상에서 어영부영 흘러간다면, 우리는 태어난 환경이라는 초기 조건으로 결정되는 수동적 존재 일지도 모른다. 태어남과 동시에 결정된 운명으로 흐르는 삶. 이는 대체 무슨 삶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