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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Mar 24. 2023

내 팔뚝에 닭고기 수프

크리스마스 2주 전에 응급실 간 얘기


때는 작년 크리스마스 2주 전. 나는 벽에 크리스마스트리를 걸고 있었다. 집이 작아 거추장스러운 트리를 놓고 싶지는 않고, 그래도 축제 분위기는 느끼고 싶었던 나를 위해 친구가 보내 준 벽걸이형 트리였다. 아이는 아빠 집에 갔고, 친구와 점심을 먹고 들어온 난 콧노래를 부르며 트리를 꺼내 탁자 위로 올라갔다. 트리를 걸고 예쁘게 장식해서 아이가 오면 짠~ 하고 보여줄 셈이었다.


그런데 사달이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탁자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발 헛디뎠는진 모르겠고, 착륙 지점은 아마도 탁자 옆 의자 팔걸이... 안돼! 저 딱딱한 것에 부딪히면 정말 큰일이다 싶어 필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25년도 전에 배운 합기도 낙법 자세 2번을 떠올렸다. 팔꿈치 세워 얼굴을 보호하며 윗팔로 착지! 그거다. 얼굴로 착지하면 뇌진탕에 걸릴지도 몰라. 그 짧은 순간 별 생각을 다했다. 그리고 쾅.


내 시도는 반만 성공했다. 공중회전이 완전히 되지 않아 왼쪽 팔꿈치와 턱을 부딪히고 말았다. 턱이 찢어져서 피가 나고 왠지 어지러웠다. 바닥은 카펫이고 아무것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찢어졌는지 피가 뚝뚝 흘렀다. 아, 카펫에 피 묻으면 안 되는데, 란 생각이 들었다가, 피가 줄줄 흐르는 걸 보니 위급한 상황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지, 일단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현관문을 열어뒀다. (정신을 잃었을 경우, 구조대가 문을 따는 수고를 덜어준다고 한다.) 그리고 충전 중이던 전화기를 가지러 안방에 갔다. 턱을 지혈한 손을 타고 피가 뚝뚝 떨어져, 가다가 욕실에서 수건을 꺼내어 받쳤다.


어지러워서 일단 카펫이 없는 유일한 공간인 부엌에 앉았다. 그리고 아드레날린이 넘치는 머리로 생각했다. '앰뷸런스를 불러야 하나? 유룐데. 심각한 거 맞나? 이웃을 부를까? 다들 애가 있고, 주말 저녁 시간인데. 내가 운전해서 병원에 갈까? 그건 안될 것 같아. 택시를 불러? 계단을 혼자 못 내려갈 수도 있어.' 그때 간호사인 이웃이 생각났다. 마침 얼마 전에 애들이랑 여행을 같이 다녀왔는데, 애가 고학년이라 의젓했다.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아, 이제 어떡하지. 하는데 끊기기 직전에 응답이 왔다. 그는 교회에 갔다가 막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사정을 들은 그는 아이와 함께 바로 집에 와 주었다.


간호사답게 그는 침착히 대처했다. 아이스 팩이 있냐길래 냉동실에 있다고 하자 금방 찾아서 턱 밑에 대주었다. 피도 대충 닦아 줬다. 그러자 약간 안심이 됐는지 갑자기 팔이 아기 시작했다. 팔이 정말 너무 아팠다. 그래서 아이스팩 하나만 더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근데 가져온 걸 보니 뭔가 이상했다. 잘 보니 닭죽을 A4 사이즈 지퍼백에 얼려 놓은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아프면 누가 죽을 끓여주랴. 죽 집이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닭국물이나 닭죽을 하면 좀 더 해서 냉동실에 항상 쟁여 놓는다. 그러니까 이건, 응급 닭죽. 그런데 그걸 팔 밑에 대어 놓으니 안된다고 하기도 그렇고, 크기도 내 팔에 딱 맞았다. 뭐, 응급용이니까. 지금은 응급 상황이고. 죽은 나중에 다시 끓여도 된다. 아까웠지만 팔이 너무 아파서 뭘 가릴 처지가 못됐다.

 

잠시 후, 간호사 친구는 피가 안 멈추니 응급실로 가는 게 좋겠다고 했고, 나도 동의했다. 아이가 어릴 때 자주 아파서 응급실 행은 익숙했기 때문에 일단 가방을 쌌다. 핸드폰, 충전기, 지갑, 편한 신발, 간식.(밥때가 넘었지만 밥을 안 먹은 상태였다. 응급실에선 아마 밤엔 밥을 안 줄 것이었으므로) 친구는 나를 부축해서 차에 태우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갔다. 하지만 아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접수 앞에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내 꼴은 가관이었다.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때 입었던 하얀 바지에 피가 뚝뚝 떨어져 있었다. 접수 간호사는 예상대로 이민자들에게 가장 현타를 날리는 질문을 했다. "응급 상황에 연락할 사람 이름이랑 연락처는?" 나한테 진짜 심각한 일이 일어났을 때, 열일 제쳐놓고 날 위해 당장 달려올 사람 말이다. 차가 있거나 기동력이 있어야 하고, 영어도 해야 하고, 이민 경험도 좀 있어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아야 한다. 머릿속에 지인들 프로필이 지나간다. 일요일 밤이었고, 대부분 애가 있거나 일을 하는, 바쁘게 열심히 사는 내 지인들... 이 중 누구에게 날 위해 당장 달려와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단은 다음 날 어린이 학교에 내가 애를 데리러 가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쓴 입맛으로 애 아빠 이름을 댔다. 호주 응급실은 급한 순서로 환자를 보고, 항상 붐비기 때문에,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몰랐다. 나 혼자 나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게 분명했고, 다음 날 픽업 시간에 맞추지 못한다면, 그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게 이성적으로 옳았다.


자, 그리고 이제 현타 흥분아픔 접어 두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할 차례다. 외국어로, 침착하게. 예의 없이 굴면 안 되고 (그럴 린 없지만, 호주 응급실에서 폭력, 폭언을 할 경우 허리가 내 허리 네 배인 무서운 경비 아저씨에게 끌려간다.) 너무 안 아파 보여도 안된다. 너무 어리숙해 보여도 안된다. 너무 아프지만 착하게 참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게 제일이다. 나는 상황 설명을 하며 머리를 부딪혔기 때문에 혹시 뇌진탕이 아닐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면 분명 우선으로 진료를 봐주겠지 싶은 마음에 순발력을 발휘한 것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약한 멀미 정도의 어지러움 때문에 혼자 걷기가 조금 힘들었다. 간호사들은 약간 동정 어린 눈빛을 보내며 저 의자에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림의 시간. 불안했다. 피는 계속 나오지, 팔은 계속 아프지, 호소할 사람은 없지... 혹시 몰라서 호주 친구들이 많은 SNS 계정에 내가 있는 곳을 올리고 간략하게 상황을 적었다. 일단 가족들에겐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당장 정신을 놔도 괜찮은 정도로 상황이 일단락되자 긴장이 약간 풀렸는지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 마흔도 넘어서 얻은 경험은, 울고 싶을 때 우는 게 나쁠  없다는 것이다. 하나도 안 부끄럽다. 어차피 긴장은 풀어야 할 상황이고 허공에 대고 떠드느니 그냥 훌쩍훌쩍하는 게 훨씬 덜 이상하고 제법 불쌍해 보인다. 운이 좋으면 조금이라도 빨리 진료를 봐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날 응급실엔 대기 중인 사람이 많지 않았다. 30분 정도 되었을까? 드디어 응급실 베드를 하나 차지하고 누웠다. 간호사들은 그때까지도 내가 팔을 대고 있던 얼린 닭죽을 보더니, 크기가 딱 맞으니 계속 쓰라고 했다. 덕분에 얼린 닭죽은 혼자 응급실에 누운 나의 곁을 지켜주었다. 문자 그대로.


의사가 오더니 턱의 상처는 꿰매야 한단다. 아, 얼굴에 상처라니. 곧 한국에 갈 예정이었다. 그동안 락다운에 홈스쿨에 대학원을 겪으며 흰머리도 좀 생겼는데, 오랜만에 보는 딸이 흰머리가 삐죽삐죽하면 괜히 안쓰러워 보일까 머리도 염색한 참이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한테 얘기했다. 열흘 후에 가족 만나러 한국에 가요. 3년 만에 처음이에요. 우리 엄마가 얼굴에 상처 보시면 속상해하실 텐데. 상처 안 남게 하는 방법은 없나요? 처음 진료를 본 의사는 "한국은 성형도 유명한데 지우고 오면 되겠네" 이러고, 두 번째 의사는 "꿰매는 방법 밖에 없는데.. 최선을 다 해볼게." 란다. 첫 번째 의사한테는 성형 수술이 공짜냐 그랬더니 말이 없고 두 번째 의사는 인턴이었다... 꿰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는지, 지도 교수인 듯한 분이 들어와 말로 하나하나 다 지시를 하는데, 정말 최선을 다하느라 그랬는지 긴장이 돼서 그랬는지 세 방 꿰매는 동안 마취가 풀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두 사람은 너무나 집중하여 보통은 환자에게 한 두 마디 걸어 주는 괜찮냐, 잘 되고 있다, 금방 끝난다 등 스몰 토크도 안 하고 나는 얼굴을 덮은 거즈 수건 아래로 눈물만 줄줄 흘렸다. 아, 그냥 너무 서러운 거다. 시간은 새벽 2시 반인가 3시쯤. 집에 누워 있어도 별 생각이 다 드는 시간이다. 현생에, 또는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던가.  CT 촬영 결과 다행히 뇌진탕은 아니라지만, 팔은 팔꿈치가 부러졌다고 하고 (그리고 여전히 아프고), 미녀도 아닌데 상처가 남을 얼굴도 서럽고, 인턴 의사가 덜덜 떨며 잡아당기는 턱도 걱정되고, 호주 의사들이 모양에 신경 안 쓰고 수술하기는 유명한 일이고, 혼자 응급실에 누운 것도 서럽고, 엄마한테는 뭐라고 얘기하나, 왜 하필 지금 인지도 서럽고, 어쨌든 삼라만상 오만 가지가 다 서러웠다. 간간이 카톡 하던 친구들도 잠이 들었을 시간. 수술이 끝났을 때쯤엔 새벽 4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거의 탈진해 있었다. 다행히 그날은 베드가 여유가 있어 조금 쉬다 해가 뜨면 일찍 나가도 된다고 했다. 나는 불을 끈 침대에 누워 자다 다 하며 눈물만 계속 줄줄 흘렸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날도 태양은 떠올랐다. 내가 팔이 좀 부러지고 얼굴 좀 꿰매고 이 세상에 혼자 떨어진 듯한 슬픔을 좀 느꼈다고 해서 안 떠오를 태양이 아니다. 팔에 슬링을 하고, 혼자 응급실에서 걸어 나와 병원 앞에서 택시를 탔다. 문을 따고 집에 들어가니, 카펫의 핏자국은 여전했고, 나는 욕실에서 피 땀 눈물로 범벅된 옷을 갈아입었고, 그러다 팔이 아팠고, 그냥 좀 쉬고 싶었는데, 그런데, 배가 고팠다. 배 속이 텅 빈 진공처럼 헛헛해서 뭐든 따뜻하고 부드러운 걸 입에 넣어야 했다. 하지만 뭘 시키긴 너무나 이른 시간. 뭘 만들자니 진짜 피곤했다. 정말 진짜 너무 피곤했다... 몸이 스르르 가루가 되어 무너질 것처럼.


그런데 말이죠, 아직도 슬링 아래 내 팔 밑엔 지퍼백에 든 닭죽이 대어져 있었다. 나와 밤새 함께 하며 부드럽게 해동된, 내 입맛에 맞게 내가 만든 닭죽... 


잠시 망설이다 대접에 조심조심 지퍼백을 비운다. 딱 1인분. 대접이 전자레인지에 돌아가는 동안 창밖을 보니 하늘은 내 얼굴처럼 얼룩덜룩했고, 김을 모락모락 뿜으며 나온 닭죽은 따뜻하게 속을 채워 주었다... 아, 닭죽을 얼려 놨던 과거의 나여. 고맙다. 그대가 나를 구원했구나. 나는 이걸 먹고 침대로 간다. 카펫의 핏자국은 그다음에 생각한다. 그렇다.  완전히 혼자아니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함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의 교훈:

크리스마스트리는 위험한 물건입니다. 필히 조심합시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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