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안 Jun 13. 2023

엄마의 바람이 사라졌다

내가 엄마 삶을 훔쳐가는 거 같아.



오늘 낮, 엄마와 이런저런 카톡을 주고 받다 나온 말이었다. 대화의 시작은 골다골증 치료 주사를 맞으러 나왔다는 엄마의 근황에서였다.



엄마와 아버지는 두 손주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이래로, 1년째 언니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힘에 부친 언니를 도와주고싶다는 부모의 마음과 손주들을 향한 사랑이 이끈 선택이었다. 부모님이 계획한 노후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기쁨이 될 것이라며 언니의 손을 잡은 것이다.


실로 그들에겐 이전엔 누리지 못했던 행복들이 찾아왔다. 존재 만으로도 이미 효도를 다한 아이들의 재롱에 집안은 늘 웃음꽃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희극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비극이라 하지 않던가.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주어지는 행복은 짧고, 대부분의 시간은 밀린 집안일과 뒤늦은 후회로 채워졌다.



불행의 시작은 체력이었다. 나이 칠십이 다 되어 다시 시작된 육아는 상상 이상으로 부모님의 에너지를 빼앗았다. 소모되는 게 어디 체력 뿐이겠는가. 엄마는 자세히 알고싶지 않은 언니네 가정사까지 매일 마주하며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 부모님에게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짐 하나. 모두가 한 지붕 아래에서 복작대며 사는 동안, 서울 어딘가에서 홀로 살아가는 딸이 하나 있다. 밥은 먹고 사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눈에 보이지 않아 늘 걱정이 앞서는 막내 딸, 그게 나다. 그들에게 막내 딸은 확실히 복병이었다. 독립한지 이제 갓 1년을 넘은 초짜라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많지 않았던 것이다. 세탁할 때 섬유제는 얼마나 넣는지, 머리카락으로 꽉막힌 화장실 하수구는 어떻게 처리하는지.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를 해대는 통에 골치를 앓았을 테다.   



그럼에도 휴대전화 넘어 들리는 얕은 기침 한번에, 귤 한박스 사들고 한달음에 달려오는 게 부모님이다. 함께 들고 온 보따리는 또 얼마나 대단한가. 이전 날 스치듯 얘기했던 리필용 롤 테이프부터 마침 똑 떨어진 치약,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름 옷까지 정갈하게 채워져있다. 매번 보는 부모님이지만, 볼 때마다 감탄스러운 섬세함이다.



평생 따라할 수도 없을 보살핌. 그들은 3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두 자녀를 돌보며, 한 해 한 해 더 빠른 속력을 내며 늙어가고 있다. 그 맹렬한 속도는 분명 두 자녀가 그들의 시간을 야금야금 훔쳐먹은 탓에 빨라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1년 정도 됐을까.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에게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바람, 언제부턴가 엄마는 무언가 하고싶다는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소진된 기력때문인지 부쩍 입이 무거워진 엄마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만을 온몸으로 말할 뿐이었다. 어느 날은 푹 꺼진 눈 밑으로, 또  어느 날은 둘째 손주를 안다가 무너진 허리로. 잃어버린 시간의 알맹이는 자식들이 먹고, 바싹 마른 껍데기만이 엄마의 몸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당신의 최선이자 행복이라고 자랑했던 희생의 결과가 이것인가.



나는 점점 더 작아지는 엄마에게서 전보다 더 짙어진 어둠을 본다.  바쁠 것 없어도 스스로 걸음을 재촉해 성큼 다가오는 어둠. 종국엔 영원한 헤어짐으로 치닫을 결말, 엄마의 죽음.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의 끝을 생각하면 한없이 두렵다. 비록 그 끝이 나 조차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결론일지라도, 엄마의 끝은 나의 마지막보다도 마주하고싶지 않은 비극이다.  



엄마가 없는 세상은 온전할까? 나는 가끔 엄마가 사라진 일상을 상상해본다. 다 알면서도 엄마, 하고 부르면 돌아오지 않을 대답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삶. 나는 오래도록 마르지 않는 슬픔 속에서 허우적대다 끝내 가라앉겠지.



그래서 엄마는 나를 자주 혼낸다. '나약한 소리 하지마. 엄마가 없어도 다 살아져. 비빌 곳이 없을 때 인간은 가장 강해지는 법이야.' 엄마는 알고 있다. 나의 가장 큰 약점이 엄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엄마 라는 말만 들어도 애달퍼지는 여린 나라서, 그런 내가 삼십 중반에도 어리광을 부릴 때면, 깊어진 주름에 더 힘을 세워 내게 쏘아부친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단호해지는 마음. 그 속엔 부디, 자신보다 소중히 지켜왔던 나의 삶을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껴주며 꿋꿋이 살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엄마에게서 유일하게 지워지지않는 바람이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시계는 바삐 돌아간다. 엄마와의 헤어짐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걸 흐르는 시간은 말해주고 있다. 얼만큼 남아있을지 모를 엄마와 나 사이의 시간. 그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나는 최선을 다해 엄마의 바람을 지키려한다.


엄마로부터 받은 귀한 인생, 그녀의 멋진 딸로서 충실히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엄마와 이별하는 날이 와도, 너무 오래 슬픔에 잠식되지 않도록. 그리운만큼 자주 찾아올 엄마 생각에 시도 때도 없이 눈시울이 붉어지더라도, 푸흐-하고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엄마와의 추억을 부지런히 쌓으면서.



그렇게 삶에 근육을 한겹 한겹 쌓다보면 나는 제법 단단해지겠지. 그러면 곧 엄마도 좀 더 마음을 놓고 딸에 기대어 잊고 있던 바람을 다시 불 수 있지 않을까. 그땐 내가 먼저 엄마에게 말해야겠다. 엄마는 사실 여행을 좋아하는 낭만가라고. 더 늦기 전에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산토리니부터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매거진의 이전글 ‘랠리’라고 쓰고 ‘다정한 대화’라 읽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