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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안 Jun 10. 2023

‘랠리’라고 쓰고 ‘다정한 대화’라 읽는다

배드민턴과 인간관계의 공통점  

요즘 무슨 낙(樂)으로 사세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빠지지 않는 답변이 하나 있다.   

바로 전신 운동의 끝판왕 ‘배드민턴’이다.      


수식어구답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움직여 운동 효과가 탁월하기도 하지만, 배드민턴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손끝에 있다. 핑-퐁 하고 셔틀콕이 채에서 튕겨 나갈 때, 손끝에서부터 타고 넘어오는 명랑한 진동이 매력적이다.      


사실 고백하자면, 배드민턴을 좋아하는 마음에 비해 전문적으로 치는 것은 아니다. 기술보단 재미로, 속도보단 여유로 배드민턴에 임한달까. 태생이 평화주의자라 강스매시가 오가는 경기보단 느긋한 랠리(Rally)를 즐기는 편이다. 어쩌면 이 선택도 배드민턴을 좋아하는 마음을 지켜주고픈 바람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함께 하는 모두가 그저 재밌게 즐기길 바라는 마음. 그 모두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은 나다.    

    

평화를 수호하려는 의지만큼 승리욕도 강해 패배에 쉽게 상처받는 나란 인간. 나 혹은 내가 속한 팀이 지기라도 하면 이길 때까지 끝장을 봐야 하는 욕망이 들끓는 자다. 십대 시절 한 번쯤 느껴봤을 전설의 피구 감성 같은 것이라고 하면 금방 이해하리라 믿는다. 


재미로 시작한 게임이 피의 전쟁으로 변질한다는 그 피구. 이겨야 한다는 일념으로 던진 강속구 공과 맞은 자들의 웃음기 가신 얼굴, ‘두고 보자’는 눈빛을 장착한 채 코트 밖으로 나갈 때 번지는 초 긴장감, 이를 지켜보는 친구들의 불안한 눈빛까지. 팽팽한 신경전이 오가는 대환장 피구의 중심에 늘 내가 있었다. 승부에 언제나 진심이었던 내가.      


놀랍게도 그땐 그랬지 싶은 승리욕이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하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게임 대신 운동에 집중하기. 특히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는 운동일수록, 승패가 갈리는 운동일수록 부단히 나를 지키려 애쓴다. 광기 어린 승리욕 때문에 재미도, 사람도 잃지 않는 것이 목표다. 



단 5초 만으로도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배드민턴. 그 치열한 현장에서 승부의 부담을 떨칠 방법은 오직 랠리뿐이다. 랠리는 몸짓으로 이어가는 대화다. 셔틀콕이 인 플레이(in play) 상태에 들어갔을 때부터 흐름이 끊어질 때까지 상대와 계속하여 주고받는 행위를 뜻한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단순 반복 행위로 보일 수 있겠지만, 방점은 ‘흐름이 끊어질 때까지’에 있다. 랠리는 실제 배드민턴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쟁 구도다. 고난도 공격과 방어 기술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질수록 랠리는 오래간다. 상대가 받아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던지고 악착같이 받아내는 과정, 여기서 승부를 걷어내면 무엇이 보이는가?     

 

바로 다정함, 핑퐁을 이어가기 위한 서로의 세심한 배려다. 셔틀콕의 이동 포물선은 조금만 커지면 코트 밖으로 벗어나기 쉽고, 채의 헤드(head)나 넥(neck)에 맞으면 힘없이 떨어진다. 거트(줄)의 어느 위치에 콕이 맞는지에 따라 날아가는 방향도 천차만별이고.      


랠리의 핵심은 상대가 치기 쉽도록 셔틀콕을 보내주는 다정함에 있다. 상대의 성향을 잘 파악해 던질수록 그의 타율도 높아지는 법. 이를테면, 속도에 약한 사람에겐 포물선을 넓게 그려 공을 마주할 시간을 넉넉히 주고, 백핸드가 약하면 포핸드로 칠 수 있도록 공을 높이 띄워 보내는 것이다. 상대의 약점보단 강점이 발현되도록 던지는 것, 그리하여 편안한 대화가 오가도록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이 내가 선택한 방식이다. 


배드민턴을 대하는 자세는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된다. 힘든 관계는 자주 끊기는 랠리와 같다. 상대가 받아치기 어려운 상태로 계속 콕을 돌려준다면 그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 아마 두 사람은 랠리를 대하는 서로의 정의가 처음부터 달랐을 것이다. 승패를 결정짓는 경쟁과 다정한 대화 중,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랠리를 해보면 안다. But 오해하지는 마시라. 무조건 공격이 잘못됐다기보다, 애초에 냉정한 승부의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정의가 아닌 서로의 성향이 다르다면, 랠리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확인해보면 된다. 서로 의지가 있다면 긴 여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테니까. 노력없는 랠리의 끝은 순정이 아니다. 게임 끝일 뿐이다.         

 

나는 다정한 랠리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좋다. 서로의 상태와 속도를 세심하게 이해해야 비로소 긴 호흡으로 이어갈 수 있는 랠리 파트너를 만나고 싶다.      


얼마 전,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에게 좀 더 다정하게 말해줄 수 없나요?’ 소심하고 여린 나를 파악하고 있었던 상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제가 당신에게 맞추면 저는 이 관계를 오래 이어갈 수 없어요. 저를 바꾸라는 소리잖아요. 전 그건 못해요.’ 아주 가열한 스매시였다. 이 말을 끝으로 이후의 핑퐁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매몰찼던 대답이다.      


아마도 내 성격이라면 상대의 강한 스매시로 날개가 찢긴 셔틀콕을 살살 털며, 몇 차례 랠리를 시도했을 테다. 대화를 좋아하는 상대를 위해, 어떤 말을 하면 내가 다칠지 알지만 맞춰 줄 의지가 없었던 그에게 억지로 맞추며. 그 덕에 핑퐁은 몇번 더 오갔지만, 결국 각자의 속도와 힘이 달라 빠르게 끊겼다. 당연히 지금은 그와 랠리를 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대화를 경쟁으로 받아치는 이에게 에너지를 쏟지 않게 됐다는 말이다.  

    

이 사건으로 얼마간 속앓이를 했지만, 이제는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 감정의 부침이 많았던 랠리 속, 꼭 붙들고 있었던 다정함의 체로 최악을 걸러낼 수 있었으니까. 나와는 단식 경기를 하는 동안 동시에 다른 파트너와는 다정한 랠리를 하고 있었다는 건 덤으로 알게 됐고(미친놈).        


앞으로도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다정함의 체를 쥐고 랠리를 시도할 것이다. 상대가 던지는 셔틀콕에 다정함이 묻어 있다면, 가끔 채에 맞아 엉뚱하게 던질 때 ‘그럴 수 있지!’ 라고 웃으며 화답할 여유가 있다면, 그리고 그게 당신이라면, 나는 당신을 기꺼이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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