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우리 부부는 아이 없이 소소하게 행복하다
그저께 연남동의 작은 펍. 나와 마흔 살 동갑내기 친구 3명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늘은 적당히 마시고 귀가하자는 계획은 2병째 위스키 뚜껑을 여는 순간 끝장났다. 아~ 진짜 두 번째 병은 안 시켰어야 하는데. 기억이 가뭇가뭇하지만 술자리 초반부에 결혼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은 기억한다.
똑 같은 마흔 살 남자 넷인데도 내적 구성(?)은 다양했다. 자식 있는 기혼자 1명, 자식 없는 기혼자 2명, 미혼자 1명. 자식 있는 기혼자 A는 아이가 아직 돌이 막 지난 초보 아빠였다. “아빠 됐더니 많이 힘들지.”라고 슬쩍 물었는데 괜찮다며 특별히 힘들지 않다고 대답한다. 표정도 싱글벙글하다. 응? 보통 육아 초보들은 오만상을 찌푸려가며 어려움을 토로하지 않나? S는 음악인으로, 집에서 일하며 부부가 함께 아이를 키우기에 육아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
분명히 힘들 것이다. 힘들어야만 한다. 힘들지 않냐고 재차 묻자. 힘든 점도 있지만 생각보다 괜찮다며 부부 모두 바깥 나들이도 가능하다고 한다. 아내가 약속 잡았을 땐 자기가 애 보고, 오늘처럼 자기가 나올 땐 아내가 챙긴다는 설명. 이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음흉한 목적을 가지고 육아 이야기를 꺼냈다. 출판사와 ‘아이 없는 결혼생활의 즐거움’에 대해 책을 계약해 놓았기에 소재를 얻으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A는 전혀 도움이 안됐다.
“아이 없던 행복한 시절이 떠오른다든가 이런 거 정말 없어?”
“몰라. 생각해보면 있을 것도 같은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나네.”
“에이 됐고. B, 너는 아이 안 낳는다며 프리한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는 기분은 어때?”
프리하긴 개뿔. B는 1년 전쯤 결혼했으나 출산 계획은 없는 친구로, 요즘 기분은 별로라고 한다. 결혼 생활과는 무관하며, 어차피 인간이란 자기 삶을 홀로 직면해야 하는 외로운 존재이기에 결혼을 하든 아이를 낳든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대학 다닐 때부터 현학적인 친구였는데 나이 들어도 바뀌는 게 하나 없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마지막 남은 C는, 아니다 그래도 아이는 필요하다. 앞으로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르는데, 차가운 세상에 나와 이어진 있는 유일한 동앗줄 같은 존재가 바로 자식이라며 그럴듯한 소리를 했으나, “애인도 없으면서 쓸데없는 소리냐”는 핀잔만 듣고 말았다. 불쌍한 C.
불쌍한 C를 놀리며, 아, 아니 위로하며 한 잔 두 잔 기울인 술에 우린 만취했다.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 그날 그러니까 어제, 깨어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워드 파일에 끼적인 교훈 3가지는 다음과 같다.
교훈 1) 딱 한 병만 더 마실까 고민스러울 땐 마시지 말자
다음 날이 정말 괴롭다. 주말이 순식간에 삭제된다. 막상 그날 뭐하고 놀았는지 기억도 안 난다.
교훈 2) 술 마시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하지 말자
애초에 술자리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려던 게 실수였다. 술 3잔 넘어간 순간부터 머리가 아닌 혀가 말하기 시작한다. 아무 말 대잔치다. 진지한 이야기는 커피 마시면서 하는 걸로 하자.
교훈 3)
결혼생활은 결국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 결혼은 으레 이러이러하다는 일반론이 통하지 않는다. 예측 불가능한 존재인 인간 둘이 만나 이루는 결혼이란 우주가 단순할 리가 없다. 남들의 기준에 휘둘리지만 않으면, 뒤집어 말해 부부 둘이 자기들의 기준으로 결혼 생활을 꾸려나가면 거기에 일반론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둘의 의지와 노력만이 남는 셈이다.
지난 글의 마지막, 사람들이 가장 자주 묻는 질문, 아이 없이 둘이서만 지내도 쭉 재밌느냐,에 대해서 와이프 입장은 알 수 없으나 난 매우 즐겁다. 각자의 취향을 추구하면서 함께 있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는 완벽한 밸런스다. 빠듯한 예산이지만 요리조리 여유를 내어 1년에 한 번씩 긴 해외여행을 떠난다. 주말엔 마치 한석봉과 석봉이 어머니처럼 아내는 빵을 굽고, 난 책을 읽는다. 혹은 난 게임을 하거나 아내는 막장 드라마를 시청한다. 저녁은 뭐 먹을지 고민한다. “태국식 쌀국수 먹으러 갈까?” “오늘은 서양 음식 먹고 싶은 기분이야.” “그러면 파스타?” 넷플릭스로 함께 영화를 본다가 잠에 든다. 요컨대 소소하게 누리는 삶의 모든 순간순간이 즐겁다.
세상사에 탁월한 감성의 촉수를 가졌던 평론가 고어 비달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을 상관하지 않는 것이 스타일이다.” 자신을 ‘우리 부부’로, 스타일을 ‘좋은 결혼생활’로 바꿔도 딱 들어맞지 않을까.
<이후 글 예고>
저희 부부가 사실 큰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보통의 경험만 하는 부부라서요. 글에 나온 "요컨대 소소하게 누리는 삶"에 대해서 잔잔한 글을 쓸 예정입니다. 다만 비교적 독립적인 성향이 강해서, 자신만의 개성 혹은 습관을 지키면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픈 분들에겐 조금 도움이 될 것도 같습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