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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나나킥 Feb 24. 2016

진짜 ‘설계’는 나가사키에 있었다

여행 마지막에 들른 가메야마샤추는 영화 <내부자들>의 ‘조국일보’ 같은 곳이었다. 가메야마샤추를 만든 사카모토 료마는 이강희 논설주간처럼 거대 프로젝트의 ‘설계자’였다. 물론 역할이 그러했다는 것이지, 가치는 전혀 다르다. 료마는 근대 일본을 만든 위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료마는 막부가 정권을 일왕 조정에 반환하는 ‘대정봉환’을 기획하고 이를 실현했다. 1만석 이상의 영지를 보유한 봉건영주 ‘다이묘’의 지배기구를 번(藩)이라 하는데, 료마는 유력한 번인 사쓰마번과 조슈번 간의 동맹을 성사시킴으로써 왕정복고를 이뤄냈다.

무역회사인 가메야마샤추는 이 프로젝트의 구심점 역할을했다. 조국일보가 그러했듯.



1835년 태어난 료마는 청년기에 에도에서 왕권복권과 서양배척을 추구하는 존왕양이주의자들과 사귀었다고 한다. 그는 1862년 친서양파인 가쓰 가이슈를 암살하려다 설득에 감명받아 오히려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료마는 가쓰의 소개로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교류하게 됐고, 사이고의 보호 아래 나가사키에 무역·해운회사인 가메야마샤추를 세웠다.      



가메야마샤추는 조슈번이 영국 상인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로부터 총기 7300정과 군함을 사들이는 것을 중개한다. 그리고 1866년, 료마는 서로 적대하던 사쓰마번(사이고 다카모리)과 조슈번(기도 다카요시) 간의 동맹을 성사시킨다. 이 해 막부는 조슈번을 공격했지만, 서양 무기와 군함으로 무장한 조슈번은 막부군을 참패시킨다.  



료마는 1867년 도사번을 부추겨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막부에 건의하도록 만든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군사력으로 교토를 장악했고, 그들의 촉구에 따라 메이지 일왕은 1868년 1월 왕정복고를 공식 선포한다.      

그는 왕정복고가 이뤄지기 직전인 1867년 12월 10일, 막부가 보낸 괴한들의 습격으로 교토에서 31세 나이로 사망한다.      


료마는 함께 일본 3대 영웅으로 꼽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와 달리 쇼군(막부 최고 지배자)이 아니다. 지방 지배자인 다이묘도 아니었다. 주요 지도자들 사이를 이어주고, 그들에게 ‘대정봉환’이라는 비전을 제시한 중개인이었다.


'일본인들은 암살당한 위인을 영웅으로 추앙한다'고도 하지만 그가 지배자가 아니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인기요인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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